Decree on Conditions for Plenary Indulgences- During the Year of the Consecrated Life

DECREE
URBIS ET ORBIS
 
by which are established the works to be accomplished in order to obtain the gift of Indulgences on the occasion of the Year of the Consecrated Life.

 

 

[교령] 봉헌 생활의 해 대사 교령

사도좌 내사원
봉헌 생활의 해 대사 교령
(2014.11.23.)

봉헌 생활의 해에 대사의 모든 은총을 얻는 데 필요한 선행을 지정한다.

수도 단체들이 언제나 설립 은사에 더욱 더 충실하도록 쇄신을 하고 전 세계 그리스도 신자들이 거룩한 교회의 친교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굳건히 하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시려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다가오는 봉헌 생활의 해를 계기로, 최근에 수도회성 장관 추기경은 이 사도좌 내사원에 대사의 은총을 얻는 데 필요한 선행을 정식으로 지정해 주도록 요청하여, 내사원은 교황의 특별 위임으로 일반 조건(고해성사, 영성체, 교황의 지향에 따른 기도) 아래서 봉헌 생활회의 모든 회원과 참으로 참회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신심 깊은 신자들에게 올해 대림 제1주일부터 2016년 2월 2일까지 전대사를 기꺼이 수여한다. 또한 이 전대사는 연옥 영혼들에게도 대리 기도의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가) 로마에서는, 수도회성이 정해 제시한 일정에 따라 국제 대회와 행사에 경건하게 참석하고, 적어도 얼마 동안 경건한 묵상을 한 뒤에 주님의 기도와 승인된 신경을 바치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간구할 때마다 전대사를 얻을 수 있다.

나) 모든 개별 교회에서는, 교구가 정한 봉헌 생활의 날과 봉헌 생활의 해를 위하여 마련한 교구 행사 때에, 주교좌 성당, 지역 직권자의 동의로 지정된 다른 거룩한 장소, 수도원의 성당이나 봉쇄 수도원의 경당을 경건하게 방문하여 그곳에서 공적으로 거행하는 성무일도를 함께 바치거나 적어도 얼마 동안 경건한 묵상을 한 뒤에 주님의 기도와 승인된 신경을 바치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간구할 때마다 전대사를 얻을 수 있다.

봉헌 생활회의 회원 가운데 건강이나 다른 중대한 이유로 그 거룩한 장소들을 방문할 수 없는 이들도 모든 죄를 끊어버리고, 전대사를 얻기 위한 세 가지 일반 조건들을 가능한 대로 먼저 이행하겠다는 의향을 지니고 열망하는 마음으로 영적인 방문을 하여, 자신의 질병과 삶의 어려움을 마리아를 통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봉헌하고 위의 기도들을 바치면 전대사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교회의 열쇠로 하느님의 용서를 더 쉽게 얻도록 목자의 사랑으로 다가가는 사도좌 내사원은 고해 전담 의전 사제들, 참사들, 수도 사제들,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적절한 권한을 받은 다른 사제들이 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거행하고 병자들에게 자주 성체를 분배해 주도록 간곡히 요청한다.

이 교령의 모든 것은 봉헌 생활의 해에만 유효하다. 이에 반대되는 것은 무효이다.

로마, 사도좌 내사원에서
2014년 11월 23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내사원장 마우로 피아첸차 추기경
부원장 크지슈토프츠 유제프 니키엘 몬시뇰

우리강산 천하제일, 연광정 [고진석 신부의 겸재 화첩 감상]

▲ 연광정 練光亭|비단에 엷은 색|28.6×23.9cm|Yeongwangjeong Pavilion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소장
▲ 연광정 練光亭|비단에 엷은 색|28.6×23.9cm|Yeongwangjeong Pavilion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소장

중원의 큰 나라를 흠모하고 섬겼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하늘의 자손인 줄도 잊어버리고, 아침 첫 햇살을 맞는 신령한 백성임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궁벽한 동쪽 나라 오랑캐라고 얕잡아 보이면서도 대륙의 빛나는 문명을 누리고 싶어 안달했다.

무엇을 하든 큰 나라 사람들을 따라하면서도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 칭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것은 무엇이든 촌스럽고 속되게만 보였으므로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남의 식대로만 흉내를 내었다. 그러던 이 나라 사람들의 눈에 어느 때부터인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이 보이고, 우리 겨레의 정겨움이 가슴에 다가왔으니 어인 까닭인지 모르겠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강산을 화폭에 담아내려는 시도들이 늘어났다. 이런 흐름에 겸재 정선이 우뚝 솟아있다. 물론 겸재 이전에도 실제 산천을 그리는 전통은 있었다. 하지만 실경산수(實景山水라 불리는 이런 그림들과 겸재의 그림은 달랐다.

겸재는 맑고 투명한 하늘 아래 수려한 자태로 빛나는 실제 풍광을 자신만의 독특한 붓놀림으로 담아냈다. 그는 중국 산수화의 두 갈래인 북종화와 남종화를 절충·조화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일구어 냈다. 북종화는 투명한 대기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화북지방의 산세를 선(線) 위주로 나타냈고 남종화는 늘 안개가 끼고 물이 많은 강남지방의 풍경을 먹의 번짐을 통해 표현했다. 겸재는 양자의 절묘한 조화를 통하여 우리나라 금수강산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표현하였다. 겸재는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새로운 화풍으로 조선 회화의 어엿함과 긍지를 보여주었다.

이번에 소개되는 그림은 겸재 정선이 그린 연광정(練光亭)이다. 지난 2006년,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반환된 겸재 화첩에 끼어 있는 그림이다. 연광정은 평양의 대동강 강변에 위치하여 경치 좋기로 유명한 정자이다. 두 채의 건물이 기역자로 모서리를 맞추어 지어진 정자는 사면이 탁 트인 바위 위에 얹혀 있다. 이 바위가 덕암(德巖)이고, 그 아래편 옹성으로 둘러싸인 문루가 평양성의 동문이자 정문 노릇을 했던 대동문(大同門)이다.

대동강을 건너 대동문으로 평양에 입성한 사람들이 다리도 쉴 겸, 풍광도 즐길 겸 오르던 곳이 연광정이었다. 대동강 물결에 햇살이 아른거리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기에 정자 이름이 연광이다. 정자와 누대치고 좋은 경치를 끼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마는 연광정은 특별하다.

정자에 올라 강의 위쪽을 바라보면 모란봉과 청류벽이 강기슭을 병풍처럼 두르고 그 앞에는 능라도가 그림처럼 떠 있다. 그 광경은 마치 햇빛에 빛나는 비단결 같다. 강 건너 아스라이 보이는 벌판과 긴 숲 밖에 점찍은 듯 이어진 산들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장관이다. 그러기에 연광정은 관서팔경(關西八景) 중 하나로 꼽혔고, 주지번(朱之蕃, 1595-?)이란 명나라 사신은 그 풍광에 놀라 제 손으로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어놓았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솜씨를 지닌 겸재도 조선제일, 아니 천하제일의 경치를 화폭에 담았다. 겸재의 낙관 옆에 쓰인 <해동제일승 제일필>(海東第一勝 第一筆)이라는 글귀가 그 뜻이다. 아직도 열리지 않은 북녘 땅의 절경이 대가의 차분하고 꼼꼼한 필치 아래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고진석 이사악 신부(성 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아 [고진석 신부의 겸재 화첩 감상]


▲ 고산방학孤山放鶴|비단에 엷은 색|29.1×23.3cm|Releasing a Crane in Mount Gusahn|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소장

구제역이 있던 해 겨울은 살 떨리는 계절이었다. 근래 들어 겪어보지 못했던 유난스런 추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온 나라 농촌을 휩쓸어버린 몹쓸 역병 때문이기도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산목숨들을 모질게도 끊어버렸다. 처참한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해 봄은 그야말로 찬란한 슬픔의 봄이고 침묵의 봄이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요즘은 봄을 알리는 매화꽃 소식이 더욱 간절하다. 내내 매섭고 살벌한 겨울을 보냈으니 필시 그 향기 깊고 그윽할 텐데.

봄의 전령 매화는 선비들이 좋아하는 꽃나무이다. 이른 봄, 눈 속에서 꽃을 피워내는 매화는 선비의 지조를 쏙 닮았다. 그밖에 선비들이 좋아했던 꽃나무에는 깊은 산중에서도 청초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로 피어나는 난초, 늦가을에 모진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 한겨울에도 그 푸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가 있다. 선비들은 군자의 풍모와 덕행을 지녔다하여 이 꽃나무들을 사군자로 높여 불렀고, 글과 그림의 단골 소재로 삼았다. 겸재 정선이 그린 고산방학도(孤山放鶴圖)에 매화를 지극히 사랑했던 한 선비가 등장한다.

송나라 때 시인 임포(林逋, 967~1028)는 항주사람인데, 평생을 홀아비로 살면서 세속 일에 연연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살았던 시인이다. 그의 삶을 닮은 시는 맑고 그윽했지만 그는 시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싫어했다. 지은 시를 불살라 버렸고, 후세에 전하여질 것이 두려워 시를 읊되 기록하지 않기도 하였다. 그가 은둔한 곳은 서호(西湖) 근처의 고산(孤山)이란 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초당 주위에 수많은 매화나무를 심어 놓고 학과 사슴 한 마리를 기르며 처자도 없이 혼자 살았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사슴의 목에 술병을 걸어 술을 사러 보냈고, 손님이 오면 하늘을 날던 학이 이를 보고 울며 반겼다고 했다. 사람들은 임포를 두고,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두었다(梅妻鶴子)’고 했다.

고산방학도는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시중드는 아이를 곁에 둔 임포가 막 꽃을 피운 매화나무에 기대어 하늘로부터 날아드는 백학을 바라보는 장면을 담고 있다. 속세의 더러움이 하얀 눈 속에 감추어졌고, 강산의 적막함은 숨어사는 선비의 쓸쓸한 정감을 자아낸다. 적막강산에 잔설을 가지에 얹고 꽃을 피워낸 매화의 자태는 은일처사의 고고하고 청빈한 삶을 떠오르게 한다.

장수를 상징하는 신선의 새인 학 역시 청빈한 은자의 벗이 되었다. 이렇듯 고산방학도는 임포라는 인물과 서호라는 장소 그리고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가 한 화면에 어우러져 은일처사의 고아한 삶을 잘 드러내는 그림이다. 물론 겸재가 임포의 생활을 눈으로 보고 그리지는 않았다. 중국역사속의 유명한 인물들의 일화를 상상하여 그린 이런 그림들을 고사인물화라 한다.

겸재는 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단정한 필치로 인물의 복식을 그리고, 푸른색과 담홍색을 위주로 한 색채를 구사하여 인물에 강조점을 주고 있다. 비슷비슷한 구도와 장면들이 담긴 그림이 같은 제목으로 많이 전해진다. 그래도 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그림이다.

아직도 축생들의 원혼과 죽음의 악취가 음산하게 떠다닐 지도 모르는 이 봄에 매화타령이 가당키나 한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김없이 찾아온 봄의 전령을 시인의 입을 빌어 반겨본다. “모든 꽃들 다 졌는데 홀로 아름다워, 풍정을 독점하고 정원을 향하였네.(衆芳搖落獨暄姸 占盡風情向小園) 맑고 얕은 물 위에 성긴 그림자 가로 비끼고, 황혼녘 달빛 속에 은은한 향기 떠도누나.(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산원소매山園小梅 중)

고진석 이사악 신부(성 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