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7) – 그레고리 기게리히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

덕원 수도원, 1913년 4월 29일 생, 독일 뷔르츠부르크 교구 출신
세례명: 루드비히
첫서원: 1932년 10월 20일
한국 파견: 1939년 1월 6일
소임: 덕원 수도원 사진 담당 및 주교 아빠스 운전사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3일/4일, 평양 인민교화소

 

그레고리오 기게리히(Gregor Giegerich, 1913-1950) 수사는 1913년 4월 29일 운터프랑켄 Unterfranken 지방의 그로스발슈타트 Großwallstadt에서 농부인 알로이스 기게리히 Alois Giegerich와 그의 부인 베르타Berta사이에서 열두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나 루드비히Ludwig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926년 3월 27일 자 그의 중등학교 졸업 증명서에 보면 성실한 반면 성적은 보통이고 문법과 맞춤법이 문제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그가 쓴 편지를 보면 자기가 겪은 일을 명쾌하고 정확하게 서술하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1928년 4월, 그는 실습생 신분으로 뮌스터슈바르작Münsterschwarzach수도원에 들어가 전기 설비 기술을 배웠다. 도제기간이 끝나기 전인 1929년 3월 수도원에 입회했을 때, 그는 품행이 우수하고 노력이 두드러지며 선택한 직능에 매우 훌륭한 소질을 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1930년 4월 그레고리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을 시작하여 1932년 10월 20일에 첫서원을 했으며 1936년 1월 19일에 종신서원을 했다.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는 1939년 1월 16일 덕원 수도원으로 선교 파견되었다. 덕원에서 그는 만능 기술자로 통했다. 전기 기술 외에 자동차에 관해서도 아는 게 많아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는 인쇄소 일로 바쁜 루도비코 피셔 (Ludwig Fischer, 裵,1902-1950) 수사 대신 그에게 자신의 운전기사 소임을 맡겼다. 방앗간 일도 그의 몫이었고 수도원 난방설비까지 관리했다. 원산 대목구 전역에서 그에게 도와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으며 본당마다 유능한 기술자인 그를 찾았다. 1940년 7월 14일부터 16일까지는 연길에 가서 연길 대목구장인 테오도로 브레허 (Theodor Breher, 白化東, 1889-1950) 주교 아빠스의 사제서품 은경축 행사를 돕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그의 생활은 1910년부터 수도원 건축과 선교지 건설이라는 무거운 짐을 져 온 1세대 독일인 선교사들의 삶과 다를 바 없이 고달팠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1940년 그는 집으로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이곳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물론 고향과는 완전 딴판이지요. 방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이 우리 유럽인에게는 그리 편치 않아도 흥미롭기는 합니다. 저는 이미 여러 번 한국 가옥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보낸 시절은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이 맞물린 고난의 시기였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의 잉카마나 수도원에 있는 동료 수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온갖 외적 환난을이겨내고 내적 평화를 누리려는 노력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겠지요. 좋은 시절이 다시 올 겁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사실 우리가 당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손안에 있으며 선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덕원 수도원에는 암울한 기운이 덮쳤다. 다행히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수도원에 특별한 호의를 보이고 많은 식자재와 가구를 주문했기 때문에 연길 수도원처럼 느닷없는 시련이 닥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련군이 철수하고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선교활동은 대폭 제한받았다. 토지개혁으로 대부분의 토지를 빼앗긴 후 선교사들의 운명은 예정되어 있었다.

1949년 5월 8일과 10일 두 차례에 걸쳐 야음을 틈타 덕원 수도원에 들이닥친 정치보위부원들은 독일인 선교사 전원과 한국인 사제들을 체포했고 14일에는 나머지 한국인 수사들과 신학생들을 해산하고 수도원을 폐쇄했다. 체포된 이들은 평양 인민교화소로 끌려갔다.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는 그곳에서 사진기를 불법으로 소지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덕원수도원에는 사진기가 많았는데 어째서 유독 그만 이런 판결을 받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은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교화소에 수감되었고 나머지 수도형제들은 같은 해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0년 1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자, 그는 좁디좁은 주교 아빠스의 추운 독방으로 이감되었다. 정신이 혼미해 가는 노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지켜만 보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가 밤낮으로 정성껏 돌본 보람도 없이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사흘간 의식을 잃고 지내다가 1950년 2월 7일 아침 6시에 조용히 선종했다. 이 일로 그는 탈진하여 한 달 동안 주교 아빠스의 감방에 몸져누워 있었다. 그에 대한 소식은 여기까지가 전부이다. 그는 1950년 10월 초, 6.25전쟁에서 승기를잡은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직전에 북한 인민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했다고 추정된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芬道通史 (분도출판 사, 2010년),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분도 2012년 겨울호 30-3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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