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tes Fidei (6)

Fr. Dagobert (Otto Friedrich) Enk OSB
Born 15 Setember 1907 in Munich
Death October 1950 in Pyongyang prison, North Korea

Testes Fidei (5)

Fr. Rupert (Josef) Klingseis OSB
Born: Jan. 5, 1890 in Munich
Death: April 6, 1950 in the Pyongyang prison, North Korea

Testes Fidei (4)

Fr. Anselm (Josef) Romer OSB

Born December 7, 1885 in Ingerkingen near Laupheim, Germany
Death November 9, 1951 in the Oksadok labor camp, North Korea

Testes Fidei (3)

Fr. Arnulf (Josef) Schleicher OSB, Subprior

Born September 21, 1906 in Pflaumloch near Nordlingen, Germany

Death June 28 1952 in the Oksadok prison camp, North Korea

Testes Fidei (2) -Fr. Lucius (Konrad) Roth OSB, Prior

Born 19 February 1890 in Weichtungen, Bad Kissingen District, Germany
Death October 1950 in Pyongyang Prison, North Korea

Testes Fidei (1)

신앙의 증인 – 신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1)

Abbot-Bishop Boniface (Josef) Sauer OSB
Builder of the Benedictine Mission in Korea
Born January 10, 1877 in Oberufhausen, Hesse, Germany
Death February 7, 1950 in Pyongyang prison, North Korea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8) – 하연근 바실리오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하연근 바실리오수사

덕원수도원
1886년 11월 10일생,독일뮌헨대교구출신
세례명:마르틴
첫서원: 1913년 10월 12일
한국파견: 1914년 5월 3일
소임:백동과덕원수도원주방담당
체포일자및장소: 1949년 5월 11일,덕원수도원
순교일자및장소: 1950년 2월 14일,옥사덕수용소

 

하연근 바실리오(Basilius Hauser, 河蓮根, 1886-1950) 수사는 1886년 11월 10일에 독일 뮌헨München대교구폴링Polling에서 태어나 마르틴Martin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출생부터 시작해서 그의 성장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미혼모 하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특별한 재능도 없었고 덩치도 왜소했다. 학업도 그리 뛰어나지 못하여 졸업 증명서를 보면 모든 학과에서 가장 낮은 평점을 받았다. 열세 살이 되던 해부터 그는 제빵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 입회를 청하며 쓴 이력서에서 자신의 성소를이렇게 밝혔다. “막시미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다룬 연극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순교하는 내용이었는데, 키가 작은 나는 성 판크라티우스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일이 나에게 축복이 된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것을 느꼈고 위대한 성인이 되려는 열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마음을 꽤 오래전부터 품어 왔으며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바실리오 수사는 1911년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13년 10월 12일에 첫서원을 하고, 1914년 5월 3일 한국에 선교 파견되었다. 1914년 5월 16일, 그는 제르마노 하르트만(Germanus Hartman, 1883-1931)수사와 고델리보아 우어(Gottlieb Auer, 閔鍾德, 1887-1952)수사와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평생 주방에서 일했으므로 수도원 연대기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기술 있는 수사들 대부분이 새 선교 지역으로 나갔지만 그는 수도원을 지켰다. 1927년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진 후 거기서 일 년 동안 전기도 수도도없는 상태에서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음식을 해 먹였다.

바실리오 수사가 중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나서야 그의 존재가 드러났다. 1935년 그가 급성 신장염에 걸렸을 때의 상황을 연대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바실리오 수사가 병에 걸려 일을 못하게 되었다. 그가 주방 일을 아예 못하게되자 어떤 문제가 생길지 그제야 비로소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인 청지원자 셋과 함께 세끼 식사뿐 아니라 빵을 굽고 소시지를 만든다. 포도주는 물론 온갖 음료도 직접 만든다. 우유가 남으면 치즈를 만들기도 한다. 김복래 레오나르도(金福來, 1896-1955)수사가 며칠동안 그를 대신해 주방에서 일하긴 했다. 그러나 고질병 때문에 쇠약해진 김 레오나르도 수사는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 상태로는 주방에서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실리오 수사가 보름간의 와병 끝에 일어나 옷을 몇 겹씩 껴입고 털외투까지 걸친 모습으로 다시 주방에 나타났을 때 몹시 기뻤다.”

1938년 10월 13일은 바실리오 수사의 서원 은경축 기념일이었다. 축하 잔치는 없었지만 수도원 연대기에는 다음과 같은 칭송의 말이 실려 있다. “그는 일 년 전까지 지칠 줄모르고 주방 일을 해 왔다. 우리는 이 기회에 그의 친절하고 희생적인 노동에 감사를 표한다. 그가 수십 년간 구운 빵, 그가 마련한 음식, 그가 만든 치즈와 소시지, 그가 짜낸 포도주들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모든 것이 지난 세월 형제들의 육신과 영혼을 지켜 주었다. 이러한 그의 영적 공덕은 언제까지나 잊혀지지않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수도원 살림은 극도로 궁핍해졌고, 바실리오 수사가 점점 변변찮은 음식을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자 아무도 그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반쯤 태운 감자를 식탁에 올렸다. 그 자신도 당황하고 부끄러웠지만 달리 내놓을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들렸으나 루치오 로트(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원장 신부만 모르는 척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루치오 원장 신부는 나중에 이런 상황을 편지에 남겼다. “지금 우리 음식은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 사람에게 이런 저런 요구를 하는 것은 좀 지나칩니다.” 사실 주방장의 존재를 확인할 때는 실수할 때 뿐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수도원 형편은 나아질 줄 몰랐다. 급기야 1949년 5월 10일 덕원 수도원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폐쇄되었다. 바실리오수사는 독일인 수도형제들과 한국인 신부들과 함께 1949년 5월 11일밤에 트럭에 실려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6월 옥사덕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어 거기서 1950년 2월 14일 숨을 거두었다. 옥사덕 수용소의 의사였던 디오메데스 메페르트(Diomedes Meffert, 1909-1998) 수녀가 그의 최후를 이렇게 증언했다. “바실리오 하우저 수사님은 수녀들이 수용소 부엌을 넘겨받기 전까지 동료 수사님 한 분과 함께 취사를 맡았습니다. 늘 밝고 명랑했던 수사님은 오랜 세월 해오던 당신 소임에서 벗어나 공사판 일을 자청하여 돌과 진흙과 물을 날랐고, 목공 일을 돕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발이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점차 웃음을 잃어 갔습니다. 때는 너무 늦은 듯이 보였습니다. 성탄절부터는 아주 조심했지만 피부 수종이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1950년이 시작되면서 복수가 찼습니다. 수사님은 숨이 막히고 목이 마르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그런 환자들은 수용소 음식을 거의 소화해 내지 못합니다. 종종 수사님은 처연히 말했습니다. ‘병든 닭 한 마리만 잡으면 안 될까? 닭고기 수프가 먹고 싶은데!” 그러나 닭을 잡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가련한 환자는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복수를 빼는 약이나 기구가 없었기에, 바실리오 하우저 수사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다가, 1950년 2월 14일 영원한 본향으로떠나가셨습니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오틸리엔수도원),Necrologium(왜관수도원),원산교구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2009년),덕원의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분도 2014년 겨울호 44-47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7) – 그레고리 기게리히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

덕원 수도원, 1913년 4월 29일 생, 독일 뷔르츠부르크 교구 출신
세례명: 루드비히
첫서원: 1932년 10월 20일
한국 파견: 1939년 1월 6일
소임: 덕원 수도원 사진 담당 및 주교 아빠스 운전사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3일/4일, 평양 인민교화소

 

그레고리오 기게리히(Gregor Giegerich, 1913-1950) 수사는 1913년 4월 29일 운터프랑켄 Unterfranken 지방의 그로스발슈타트 Großwallstadt에서 농부인 알로이스 기게리히 Alois Giegerich와 그의 부인 베르타Berta사이에서 열두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나 루드비히Ludwig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926년 3월 27일 자 그의 중등학교 졸업 증명서에 보면 성실한 반면 성적은 보통이고 문법과 맞춤법이 문제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그가 쓴 편지를 보면 자기가 겪은 일을 명쾌하고 정확하게 서술하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1928년 4월, 그는 실습생 신분으로 뮌스터슈바르작Münsterschwarzach수도원에 들어가 전기 설비 기술을 배웠다. 도제기간이 끝나기 전인 1929년 3월 수도원에 입회했을 때, 그는 품행이 우수하고 노력이 두드러지며 선택한 직능에 매우 훌륭한 소질을 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1930년 4월 그레고리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을 시작하여 1932년 10월 20일에 첫서원을 했으며 1936년 1월 19일에 종신서원을 했다.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는 1939년 1월 16일 덕원 수도원으로 선교 파견되었다. 덕원에서 그는 만능 기술자로 통했다. 전기 기술 외에 자동차에 관해서도 아는 게 많아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는 인쇄소 일로 바쁜 루도비코 피셔 (Ludwig Fischer, 裵,1902-1950) 수사 대신 그에게 자신의 운전기사 소임을 맡겼다. 방앗간 일도 그의 몫이었고 수도원 난방설비까지 관리했다. 원산 대목구 전역에서 그에게 도와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으며 본당마다 유능한 기술자인 그를 찾았다. 1940년 7월 14일부터 16일까지는 연길에 가서 연길 대목구장인 테오도로 브레허 (Theodor Breher, 白化東, 1889-1950) 주교 아빠스의 사제서품 은경축 행사를 돕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그의 생활은 1910년부터 수도원 건축과 선교지 건설이라는 무거운 짐을 져 온 1세대 독일인 선교사들의 삶과 다를 바 없이 고달팠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1940년 그는 집으로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이곳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물론 고향과는 완전 딴판이지요. 방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이 우리 유럽인에게는 그리 편치 않아도 흥미롭기는 합니다. 저는 이미 여러 번 한국 가옥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보낸 시절은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이 맞물린 고난의 시기였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의 잉카마나 수도원에 있는 동료 수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온갖 외적 환난을이겨내고 내적 평화를 누리려는 노력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겠지요. 좋은 시절이 다시 올 겁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사실 우리가 당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손안에 있으며 선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덕원 수도원에는 암울한 기운이 덮쳤다. 다행히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수도원에 특별한 호의를 보이고 많은 식자재와 가구를 주문했기 때문에 연길 수도원처럼 느닷없는 시련이 닥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련군이 철수하고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선교활동은 대폭 제한받았다. 토지개혁으로 대부분의 토지를 빼앗긴 후 선교사들의 운명은 예정되어 있었다.

1949년 5월 8일과 10일 두 차례에 걸쳐 야음을 틈타 덕원 수도원에 들이닥친 정치보위부원들은 독일인 선교사 전원과 한국인 사제들을 체포했고 14일에는 나머지 한국인 수사들과 신학생들을 해산하고 수도원을 폐쇄했다. 체포된 이들은 평양 인민교화소로 끌려갔다.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는 그곳에서 사진기를 불법으로 소지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덕원수도원에는 사진기가 많았는데 어째서 유독 그만 이런 판결을 받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은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교화소에 수감되었고 나머지 수도형제들은 같은 해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0년 1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자, 그는 좁디좁은 주교 아빠스의 추운 독방으로 이감되었다. 정신이 혼미해 가는 노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지켜만 보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가 밤낮으로 정성껏 돌본 보람도 없이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사흘간 의식을 잃고 지내다가 1950년 2월 7일 아침 6시에 조용히 선종했다. 이 일로 그는 탈진하여 한 달 동안 주교 아빠스의 감방에 몸져누워 있었다. 그에 대한 소식은 여기까지가 전부이다. 그는 1950년 10월 초, 6.25전쟁에서 승기를잡은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직전에 북한 인민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했다고 추정된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芬道通史 (분도출판 사, 2010년),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분도 2012년 겨울호 30-31 페이지

시복시성대상자 약전 (16) – 허희학 힐라리오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허희락 힐라리오 수사

 

덕원 수도원, 1888년 6월 27일 생, 독일 뮌헨-프라이징 대교구 출신
세례명: 베네딕도
첫서원: 1910년 8월 15일
한국 파견: 1911년 1월 7일
소임: 숭공학교 교사, 수도원 건축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2월 12일, 만포 관문리 수용소

 

허희락 힐라리오(Hilarius hoiß, 許喜樂, 1888-1950)수사는 1888년 6월 27일  독일 뮌헨-프라이징München-Freising 대교구 슐레도르프Schlehdorf 본당 관할인 운테라우Unterau에서 아버지 안드레아스 호이스와 어머니 마리아 호이스 사이에서 태어나 베네딕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운터파이쎈부르크Unterpeißenberg에서 마차 수리 기술을 배웠다. 수도생활을 하려는 뜻을  품고 본당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추천서를 받았다. “규정에 따라 축일과 의무축일에 자주 성체를 영했으며, 기쁜 마음으로 정비소에서 일을 했고 필요할 때에는 농사일도 했다.” 1909년 8월 15일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힐라리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10년 8월15일 첫서원을 발하고, 그 이듬해 1월7일 한국으로 선교 파견되었다. 그는 서울 백동 수도원을 시찰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 그리고 한국으로 선교 파견된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1911년 2월 21일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서울 백동 수도원은 숭공학교를 세워 한국 젊은이들에게 전문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에 이미 마차 제작 및 수리 전문 기술자(Geselle) 자격을 갖춘 힐라리오 수사는 한국에 오자마자 숭공학교 학생들에게 철공기술을 가르쳤다. 그가 맡은 제차부製車部 에서는 일반인들의 자동차 상부를 제작하고 수선하는 일도 했는데 평판이 좋았다. 1913년 11월 1일 종신서원을 발했다. 간호원 자격까지 갖춘 그는 수도원 양호실을 담당하기도 했을 만큼 유능한 일꾼이었다.

그의 재능은 1920년 8월 5일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사목관할이 서울 백동  수도원에  위임되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원산 본당을 시작으로 해서 인수받은 본당 건물들을 수리했다. 낡을 대로 낡은 건물들은 그의 손길로 다시 생기를  찾았다. 그는 1922년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가 북간도로 사목방문을 떠나면서 대동하고 갈 정도로 신임을 얻고  있었다. 1925년 가을에는 팔도구 본당 종탑 수리공사를 했다. 1928년 7월 19일  연길 지목구가 설정되고 선교지가 어느 정도 정비되자 그는 덕원 수도원으로 돌아갔으나, 그후에도 여기저기 쉴 새 없이 불려 다녔다. 1929년 9월 중순 함흥으로 가서 임시본당으로 쓸 집을 지어주었고, 11월에는 덕원 본당 관할 공소에 경당과 교리실을 지어주었다. 1930년에는 대령동 본당 성당과 사제관 신축공사를 맡았다. 이때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마적들의 습격에 대비하여 손에 칼을 들고 망을 보면서 본당을 지켰다. 그런 다음 1931년에는 합마당 본당으로 가서 성당 신축공사를 감독했다. 1933년 삼원봉 본당이 화룡으로 옮겨갈 때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건축일 뿐 아니라 제빵용 오븐을 설치하거나 비틀어진 성당 문을 바로잡는  일은 물론 예절지기로서 복사들을 지휘하는 일 같은 사소한 것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형제들이 많았다. 서원 은경축을 지냈던 1935년에도 흥남 본당 신축을 위한 기초공사를 맡았다. 약초에 대하여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그는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지시로 한국의 약초를 깊이 연구했다.

1949년 봄, 힐라리오 수사는 덕원 수도원이 공산정권에 의해 폐쇄될 조짐을  미리 발견했다. 그는 어느 날 인쇄소 일꾼 하나가 종이를 가득 담은 자루를 질질  끌고 산으로 가는 것을 보고 인쇄소 책임자인 루도비코 피셔(Ludwig Fischer, 裵,  1902-1950) 수사에게 알렸다. 하지만 루도비코 수사는 별 반응이 없었다. 3월 중순 인쇄소 일꾼 둘이 잡혀갔다. 반공 삐라를 인쇄했다는 죄목이었다. 4월 중순 루도비코 수사까지 체포되자 덕원의 종말은 시간 문제였다. 결국 5월 11일 이른  새벽, 그는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수도원에 들이닥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어 수감되었다가,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는 쇠약해져서 앉아서 겨우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약초지식을 디오메데스 수녀에게 전수하여 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구했다. 그는 거칠고  억센 큰 손으로 온갖 종류의 아름답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 내었다. 그가 만든  수용소 경당의 감실과 미사 때 쓰는 나무 촛대는 그의 깊은 신심을 보여주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담배 파이프와 귀향길에 쓸 산책용 지팡이를 만들었다. 1950년  전쟁을 일으켜 초반에 승기를 잡던 북한군이 연합군의 공세에 밀리게 되자 그와 동료들은 이른바 ‘죽음의행진’을 겪어야만 했다. 죽음의 행진은 10월 25일 만포  교화소에 이르렀다가 국경을 넘어 10월 27일 만주로, 다시 만포 교화소를 거처  관문리 수용소로 이어졌다. 관문리 수용소에서 그는 추위로 완전히 기력을 소진했다. 1950년 12월 12일 그는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한국인 포로들이 그의 시신을 밖으로 운반해 나가 매장했으며, 수도형제들이 그 장소를 확인했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

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분도 2011년 겨울호 28-29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5) – 배 루도비코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배 루도비코 수사
1902년 10월 23일 생, 독일 로텐부르크 슈투트가르트 교구 출신
세례명: 칼
첫서원: 1924년 10월 15일
한국 파견: 1925년 9월 27일
소임: 덕원 수도원 인쇄소 책임자, 청지원자 책임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4월 28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11일, 평양 인민교화소

 

배 루도비코(Ludwig Fischer, 裵, 1902-1950) 수사는 1902년 10월 23일 독일 로텐부르그-슈투트가르트Rottenburg-Stuttgart 교구 마르크트루스테나우Marktrustenau 본당에 속한 운터쉬텔츠하우젠Unterstelzhausen에서 태어나 칼Karl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 벤델린Wendelin과 어머니 헬렌네Helene는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 중 셋은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두 아들은 커서 수도성소를 받았다. 큰 아들은 발트브라이트바흐Waldbreitbach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들어갔고, 작은 아들인 루도비코 수사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7세부터 제화장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제화공 견습을 받았다. 1922년 제화기능사 자격을 딴 그는 고향에서 형과 함께 일했다.

그 이듬해 루도비코 수사는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는데, 입회청원서에 이렇게 적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수도원에 들어가 하느님을 섬기며 살기를 원했고, 이에 대해 심사숙고했습니다.” 본당 주임신부 역시 수도자로서의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는 추천서를 써주었다. “훌륭한 청년이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흠잡을 데 없이 살았습니다. 윤리적으로 올바르고 신심이 깊기에, 수도생활과 선교활동에 아주 적합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23년 10월 14일 루도비코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24년 10월 15일 그는 첫서원을 했고, 1925년 9월 27일 서울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9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파견된 10명의 수도형제들과 원산에 새로운 수녀원 설립을 위해 파견된 4명의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들과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 수도원에서 그는 구둣방 책임을 맡아 일했다.

서울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온 후 새해 첫날, 1928년 1월 1일 그는 한국인 방삼덕 빈첸시오 수사(方三德, 1898-1970)와 종신서원을 했다. 그의 유능함은 덕원에서 빛이 났다. 그는 덕원에서 구둣방 뿐 아니라 한국인 평수사 지원자 책임과 인쇄소 책임을 맡았으며 수도원 운전기사 노릇까지 하였다. 특별히 인쇄소는 그의 주된 소임이었다. 그는 식자, 인쇄, 제본까지 맡아서 많은 책을 간행했다. 인쇄소는 번창하여 1937년 새로운 작업장을 마련하였고, 1940년에는 새 인쇄기를 들여놓았다. 1940년 보고에 따르면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 천주교 교리문답 3만부, 미사경본 1만부가 발간되었고 호교론에 관한 책이 5천부 가량 팔렸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 인쇄소 때문에 그는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그리스도인들은 생존을 걱정했다. 1948년 12월 원산 내무서는 밀주 제조와 탈세 혐의를 씌워 다 고베르트 엔크 당가 신부를 체포했다. 그러나 더심각한 문제는 1948년에서 1949년으로 넘어갈 무렵 인쇄소에서 발생했다. 어느 날 직원 하나가 종이를 가득 담은 자루를 질질 끌고 산으로 가는것을 힐라리오 호이스 수사가 보고 루도비코 수사에게 알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다. 3월 중순에 직원 둘이 잡혀갔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유인물을 인쇄했다는 혐의였다. 이어서 4월 28일 현장책임자 루도비코 수사가 체포되었다. 모든 게 보위부가 꾸민 흉계였다. 반공주의자로 가장한 정치보위부원들의 꼬임에 인쇄소 직원들이 넘어간 것이다.

이 일을 빌미로 덕원 수도원은 공산정권을 전복하려는 불순분자들의 집단으로 공공연하게 낙인찍혔다. 결국 5월 9일과 11일 정치보위부원들이 두 차례에 걸쳐 수도원을 수색하였고, 독일인 수도형제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을 체포하여 평양 인민 교화소로 보냈다. 루도비코 수사는 4월 28일에 이미 평양으로 압송되어 독방에 갇혔고, 나중에 잡혀온 수도형제들과 전혀 접촉하지 못했다. 한참 뒤 그에게 세탁사역이 부과되었다.하루는 힘든 일을 하다가 양말이 완전히 찢어지자 그 꼴이 초라해 간수에게 부탁했다. “대우가 뭐 이렇습니까? 우리 집으로 소식을 전해 주면 내게 필요한 더 많은 것을 보내줄 것입니다. 소식 좀 전해 주십시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덕원 수도원 폐쇄 사실을 전혀 몰랐다. 수도원 자기 방에 십자가 대신 김일성 초상화(북한 공산당국은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를 접수하고 그곳에 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현 원산농업대학)를 설치하였다.)가 걸려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와 유죄판결을 받은 7명의 수도형제들은 평양 인민 교화소에 계속 수감되었고, 나머지 수도형제들은 1949년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후 그의 신상에 대한 소식은 임근삼 콘라도(林根三, 1919-1986) 수사에게 몰래 보낸 쪽지 편지가 전부이다. “임 수사 앞, 많이 감사합니다. 나는 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루도비코 수사가 썼습니다. 루도비코 수사 O.S.B.” 그게 마지막이었다. 6.25전쟁이 터지고,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직전인1950년 10월 11일 아침, 그는 어디론가 끌려 나갔는데 살해되었음이 분명하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분도 2010년 겨울호 8-9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