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tes Fidei (1)

신앙의 증인 – 신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1)

Abbot-Bishop Boniface (Josef) Sauer OSB
Builder of the Benedictine Mission in Korea
Born January 10, 1877 in Oberufhausen, Hesse, Germany
Death February 7, 1950 in Pyongyang prison, North Korea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8) – 하연근 바실리오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하연근 바실리오수사

덕원수도원
1886년 11월 10일생,독일뮌헨대교구출신
세례명:마르틴
첫서원: 1913년 10월 12일
한국파견: 1914년 5월 3일
소임:백동과덕원수도원주방담당
체포일자및장소: 1949년 5월 11일,덕원수도원
순교일자및장소: 1950년 2월 14일,옥사덕수용소

 

하연근 바실리오(Basilius Hauser, 河蓮根, 1886-1950) 수사는 1886년 11월 10일에 독일 뮌헨München대교구폴링Polling에서 태어나 마르틴Martin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출생부터 시작해서 그의 성장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미혼모 하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특별한 재능도 없었고 덩치도 왜소했다. 학업도 그리 뛰어나지 못하여 졸업 증명서를 보면 모든 학과에서 가장 낮은 평점을 받았다. 열세 살이 되던 해부터 그는 제빵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 입회를 청하며 쓴 이력서에서 자신의 성소를이렇게 밝혔다. “막시미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다룬 연극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순교하는 내용이었는데, 키가 작은 나는 성 판크라티우스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일이 나에게 축복이 된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것을 느꼈고 위대한 성인이 되려는 열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마음을 꽤 오래전부터 품어 왔으며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바실리오 수사는 1911년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13년 10월 12일에 첫서원을 하고, 1914년 5월 3일 한국에 선교 파견되었다. 1914년 5월 16일, 그는 제르마노 하르트만(Germanus Hartman, 1883-1931)수사와 고델리보아 우어(Gottlieb Auer, 閔鍾德, 1887-1952)수사와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평생 주방에서 일했으므로 수도원 연대기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기술 있는 수사들 대부분이 새 선교 지역으로 나갔지만 그는 수도원을 지켰다. 1927년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진 후 거기서 일 년 동안 전기도 수도도없는 상태에서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음식을 해 먹였다.

바실리오 수사가 중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나서야 그의 존재가 드러났다. 1935년 그가 급성 신장염에 걸렸을 때의 상황을 연대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바실리오 수사가 병에 걸려 일을 못하게 되었다. 그가 주방 일을 아예 못하게되자 어떤 문제가 생길지 그제야 비로소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인 청지원자 셋과 함께 세끼 식사뿐 아니라 빵을 굽고 소시지를 만든다. 포도주는 물론 온갖 음료도 직접 만든다. 우유가 남으면 치즈를 만들기도 한다. 김복래 레오나르도(金福來, 1896-1955)수사가 며칠동안 그를 대신해 주방에서 일하긴 했다. 그러나 고질병 때문에 쇠약해진 김 레오나르도 수사는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 상태로는 주방에서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실리오 수사가 보름간의 와병 끝에 일어나 옷을 몇 겹씩 껴입고 털외투까지 걸친 모습으로 다시 주방에 나타났을 때 몹시 기뻤다.”

1938년 10월 13일은 바실리오 수사의 서원 은경축 기념일이었다. 축하 잔치는 없었지만 수도원 연대기에는 다음과 같은 칭송의 말이 실려 있다. “그는 일 년 전까지 지칠 줄모르고 주방 일을 해 왔다. 우리는 이 기회에 그의 친절하고 희생적인 노동에 감사를 표한다. 그가 수십 년간 구운 빵, 그가 마련한 음식, 그가 만든 치즈와 소시지, 그가 짜낸 포도주들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모든 것이 지난 세월 형제들의 육신과 영혼을 지켜 주었다. 이러한 그의 영적 공덕은 언제까지나 잊혀지지않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수도원 살림은 극도로 궁핍해졌고, 바실리오 수사가 점점 변변찮은 음식을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자 아무도 그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반쯤 태운 감자를 식탁에 올렸다. 그 자신도 당황하고 부끄러웠지만 달리 내놓을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들렸으나 루치오 로트(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원장 신부만 모르는 척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루치오 원장 신부는 나중에 이런 상황을 편지에 남겼다. “지금 우리 음식은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 사람에게 이런 저런 요구를 하는 것은 좀 지나칩니다.” 사실 주방장의 존재를 확인할 때는 실수할 때 뿐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수도원 형편은 나아질 줄 몰랐다. 급기야 1949년 5월 10일 덕원 수도원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폐쇄되었다. 바실리오수사는 독일인 수도형제들과 한국인 신부들과 함께 1949년 5월 11일밤에 트럭에 실려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6월 옥사덕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어 거기서 1950년 2월 14일 숨을 거두었다. 옥사덕 수용소의 의사였던 디오메데스 메페르트(Diomedes Meffert, 1909-1998) 수녀가 그의 최후를 이렇게 증언했다. “바실리오 하우저 수사님은 수녀들이 수용소 부엌을 넘겨받기 전까지 동료 수사님 한 분과 함께 취사를 맡았습니다. 늘 밝고 명랑했던 수사님은 오랜 세월 해오던 당신 소임에서 벗어나 공사판 일을 자청하여 돌과 진흙과 물을 날랐고, 목공 일을 돕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발이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점차 웃음을 잃어 갔습니다. 때는 너무 늦은 듯이 보였습니다. 성탄절부터는 아주 조심했지만 피부 수종이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1950년이 시작되면서 복수가 찼습니다. 수사님은 숨이 막히고 목이 마르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그런 환자들은 수용소 음식을 거의 소화해 내지 못합니다. 종종 수사님은 처연히 말했습니다. ‘병든 닭 한 마리만 잡으면 안 될까? 닭고기 수프가 먹고 싶은데!” 그러나 닭을 잡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가련한 환자는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복수를 빼는 약이나 기구가 없었기에, 바실리오 하우저 수사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다가, 1950년 2월 14일 영원한 본향으로떠나가셨습니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오틸리엔수도원),Necrologium(왜관수도원),원산교구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2009년),덕원의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분도 2014년 겨울호 44-47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7) – 그레고리 기게리히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

덕원 수도원, 1913년 4월 29일 생, 독일 뷔르츠부르크 교구 출신
세례명: 루드비히
첫서원: 1932년 10월 20일
한국 파견: 1939년 1월 6일
소임: 덕원 수도원 사진 담당 및 주교 아빠스 운전사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3일/4일, 평양 인민교화소

 

그레고리오 기게리히(Gregor Giegerich, 1913-1950) 수사는 1913년 4월 29일 운터프랑켄 Unterfranken 지방의 그로스발슈타트 Großwallstadt에서 농부인 알로이스 기게리히 Alois Giegerich와 그의 부인 베르타Berta사이에서 열두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나 루드비히Ludwig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926년 3월 27일 자 그의 중등학교 졸업 증명서에 보면 성실한 반면 성적은 보통이고 문법과 맞춤법이 문제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그가 쓴 편지를 보면 자기가 겪은 일을 명쾌하고 정확하게 서술하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1928년 4월, 그는 실습생 신분으로 뮌스터슈바르작Münsterschwarzach수도원에 들어가 전기 설비 기술을 배웠다. 도제기간이 끝나기 전인 1929년 3월 수도원에 입회했을 때, 그는 품행이 우수하고 노력이 두드러지며 선택한 직능에 매우 훌륭한 소질을 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1930년 4월 그레고리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을 시작하여 1932년 10월 20일에 첫서원을 했으며 1936년 1월 19일에 종신서원을 했다.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는 1939년 1월 16일 덕원 수도원으로 선교 파견되었다. 덕원에서 그는 만능 기술자로 통했다. 전기 기술 외에 자동차에 관해서도 아는 게 많아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는 인쇄소 일로 바쁜 루도비코 피셔 (Ludwig Fischer, 裵,1902-1950) 수사 대신 그에게 자신의 운전기사 소임을 맡겼다. 방앗간 일도 그의 몫이었고 수도원 난방설비까지 관리했다. 원산 대목구 전역에서 그에게 도와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으며 본당마다 유능한 기술자인 그를 찾았다. 1940년 7월 14일부터 16일까지는 연길에 가서 연길 대목구장인 테오도로 브레허 (Theodor Breher, 白化東, 1889-1950) 주교 아빠스의 사제서품 은경축 행사를 돕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그의 생활은 1910년부터 수도원 건축과 선교지 건설이라는 무거운 짐을 져 온 1세대 독일인 선교사들의 삶과 다를 바 없이 고달팠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1940년 그는 집으로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이곳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물론 고향과는 완전 딴판이지요. 방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이 우리 유럽인에게는 그리 편치 않아도 흥미롭기는 합니다. 저는 이미 여러 번 한국 가옥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보낸 시절은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이 맞물린 고난의 시기였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의 잉카마나 수도원에 있는 동료 수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온갖 외적 환난을이겨내고 내적 평화를 누리려는 노력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겠지요. 좋은 시절이 다시 올 겁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사실 우리가 당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손안에 있으며 선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덕원 수도원에는 암울한 기운이 덮쳤다. 다행히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수도원에 특별한 호의를 보이고 많은 식자재와 가구를 주문했기 때문에 연길 수도원처럼 느닷없는 시련이 닥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련군이 철수하고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선교활동은 대폭 제한받았다. 토지개혁으로 대부분의 토지를 빼앗긴 후 선교사들의 운명은 예정되어 있었다.

1949년 5월 8일과 10일 두 차례에 걸쳐 야음을 틈타 덕원 수도원에 들이닥친 정치보위부원들은 독일인 선교사 전원과 한국인 사제들을 체포했고 14일에는 나머지 한국인 수사들과 신학생들을 해산하고 수도원을 폐쇄했다. 체포된 이들은 평양 인민교화소로 끌려갔다.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는 그곳에서 사진기를 불법으로 소지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덕원수도원에는 사진기가 많았는데 어째서 유독 그만 이런 판결을 받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은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교화소에 수감되었고 나머지 수도형제들은 같은 해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0년 1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자, 그는 좁디좁은 주교 아빠스의 추운 독방으로 이감되었다. 정신이 혼미해 가는 노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지켜만 보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가 밤낮으로 정성껏 돌본 보람도 없이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사흘간 의식을 잃고 지내다가 1950년 2월 7일 아침 6시에 조용히 선종했다. 이 일로 그는 탈진하여 한 달 동안 주교 아빠스의 감방에 몸져누워 있었다. 그에 대한 소식은 여기까지가 전부이다. 그는 1950년 10월 초, 6.25전쟁에서 승기를잡은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직전에 북한 인민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했다고 추정된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芬道通史 (분도출판 사, 2010년),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분도 2012년 겨울호 30-31 페이지

시복시성대상자 약전 (16) – 허희학 힐라리오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허희락 힐라리오 수사

 

덕원 수도원, 1888년 6월 27일 생, 독일 뮌헨-프라이징 대교구 출신
세례명: 베네딕도
첫서원: 1910년 8월 15일
한국 파견: 1911년 1월 7일
소임: 숭공학교 교사, 수도원 건축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2월 12일, 만포 관문리 수용소

 

허희락 힐라리오(Hilarius hoiß, 許喜樂, 1888-1950)수사는 1888년 6월 27일  독일 뮌헨-프라이징München-Freising 대교구 슐레도르프Schlehdorf 본당 관할인 운테라우Unterau에서 아버지 안드레아스 호이스와 어머니 마리아 호이스 사이에서 태어나 베네딕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운터파이쎈부르크Unterpeißenberg에서 마차 수리 기술을 배웠다. 수도생활을 하려는 뜻을  품고 본당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추천서를 받았다. “규정에 따라 축일과 의무축일에 자주 성체를 영했으며, 기쁜 마음으로 정비소에서 일을 했고 필요할 때에는 농사일도 했다.” 1909년 8월 15일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힐라리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10년 8월15일 첫서원을 발하고, 그 이듬해 1월7일 한국으로 선교 파견되었다. 그는 서울 백동 수도원을 시찰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 그리고 한국으로 선교 파견된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1911년 2월 21일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서울 백동 수도원은 숭공학교를 세워 한국 젊은이들에게 전문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에 이미 마차 제작 및 수리 전문 기술자(Geselle) 자격을 갖춘 힐라리오 수사는 한국에 오자마자 숭공학교 학생들에게 철공기술을 가르쳤다. 그가 맡은 제차부製車部 에서는 일반인들의 자동차 상부를 제작하고 수선하는 일도 했는데 평판이 좋았다. 1913년 11월 1일 종신서원을 발했다. 간호원 자격까지 갖춘 그는 수도원 양호실을 담당하기도 했을 만큼 유능한 일꾼이었다.

그의 재능은 1920년 8월 5일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사목관할이 서울 백동  수도원에  위임되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원산 본당을 시작으로 해서 인수받은 본당 건물들을 수리했다. 낡을 대로 낡은 건물들은 그의 손길로 다시 생기를  찾았다. 그는 1922년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가 북간도로 사목방문을 떠나면서 대동하고 갈 정도로 신임을 얻고  있었다. 1925년 가을에는 팔도구 본당 종탑 수리공사를 했다. 1928년 7월 19일  연길 지목구가 설정되고 선교지가 어느 정도 정비되자 그는 덕원 수도원으로 돌아갔으나, 그후에도 여기저기 쉴 새 없이 불려 다녔다. 1929년 9월 중순 함흥으로 가서 임시본당으로 쓸 집을 지어주었고, 11월에는 덕원 본당 관할 공소에 경당과 교리실을 지어주었다. 1930년에는 대령동 본당 성당과 사제관 신축공사를 맡았다. 이때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마적들의 습격에 대비하여 손에 칼을 들고 망을 보면서 본당을 지켰다. 그런 다음 1931년에는 합마당 본당으로 가서 성당 신축공사를 감독했다. 1933년 삼원봉 본당이 화룡으로 옮겨갈 때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건축일 뿐 아니라 제빵용 오븐을 설치하거나 비틀어진 성당 문을 바로잡는  일은 물론 예절지기로서 복사들을 지휘하는 일 같은 사소한 것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형제들이 많았다. 서원 은경축을 지냈던 1935년에도 흥남 본당 신축을 위한 기초공사를 맡았다. 약초에 대하여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그는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지시로 한국의 약초를 깊이 연구했다.

1949년 봄, 힐라리오 수사는 덕원 수도원이 공산정권에 의해 폐쇄될 조짐을  미리 발견했다. 그는 어느 날 인쇄소 일꾼 하나가 종이를 가득 담은 자루를 질질  끌고 산으로 가는 것을 보고 인쇄소 책임자인 루도비코 피셔(Ludwig Fischer, 裵,  1902-1950) 수사에게 알렸다. 하지만 루도비코 수사는 별 반응이 없었다. 3월 중순 인쇄소 일꾼 둘이 잡혀갔다. 반공 삐라를 인쇄했다는 죄목이었다. 4월 중순 루도비코 수사까지 체포되자 덕원의 종말은 시간 문제였다. 결국 5월 11일 이른  새벽, 그는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수도원에 들이닥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어 수감되었다가,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는 쇠약해져서 앉아서 겨우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약초지식을 디오메데스 수녀에게 전수하여 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구했다. 그는 거칠고  억센 큰 손으로 온갖 종류의 아름답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 내었다. 그가 만든  수용소 경당의 감실과 미사 때 쓰는 나무 촛대는 그의 깊은 신심을 보여주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담배 파이프와 귀향길에 쓸 산책용 지팡이를 만들었다. 1950년  전쟁을 일으켜 초반에 승기를 잡던 북한군이 연합군의 공세에 밀리게 되자 그와 동료들은 이른바 ‘죽음의행진’을 겪어야만 했다. 죽음의 행진은 10월 25일 만포  교화소에 이르렀다가 국경을 넘어 10월 27일 만주로, 다시 만포 교화소를 거처  관문리 수용소로 이어졌다. 관문리 수용소에서 그는 추위로 완전히 기력을 소진했다. 1950년 12월 12일 그는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한국인 포로들이 그의 시신을 밖으로 운반해 나가 매장했으며, 수도형제들이 그 장소를 확인했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

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분도 2011년 겨울호 28-29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5) – 배 루도비코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배 루도비코 수사
1902년 10월 23일 생, 독일 로텐부르크 슈투트가르트 교구 출신
세례명: 칼
첫서원: 1924년 10월 15일
한국 파견: 1925년 9월 27일
소임: 덕원 수도원 인쇄소 책임자, 청지원자 책임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4월 28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11일, 평양 인민교화소

 

배 루도비코(Ludwig Fischer, 裵, 1902-1950) 수사는 1902년 10월 23일 독일 로텐부르그-슈투트가르트Rottenburg-Stuttgart 교구 마르크트루스테나우Marktrustenau 본당에 속한 운터쉬텔츠하우젠Unterstelzhausen에서 태어나 칼Karl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 벤델린Wendelin과 어머니 헬렌네Helene는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 중 셋은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두 아들은 커서 수도성소를 받았다. 큰 아들은 발트브라이트바흐Waldbreitbach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들어갔고, 작은 아들인 루도비코 수사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7세부터 제화장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제화공 견습을 받았다. 1922년 제화기능사 자격을 딴 그는 고향에서 형과 함께 일했다.

그 이듬해 루도비코 수사는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는데, 입회청원서에 이렇게 적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수도원에 들어가 하느님을 섬기며 살기를 원했고, 이에 대해 심사숙고했습니다.” 본당 주임신부 역시 수도자로서의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는 추천서를 써주었다. “훌륭한 청년이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흠잡을 데 없이 살았습니다. 윤리적으로 올바르고 신심이 깊기에, 수도생활과 선교활동에 아주 적합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23년 10월 14일 루도비코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24년 10월 15일 그는 첫서원을 했고, 1925년 9월 27일 서울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9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파견된 10명의 수도형제들과 원산에 새로운 수녀원 설립을 위해 파견된 4명의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들과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 수도원에서 그는 구둣방 책임을 맡아 일했다.

서울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온 후 새해 첫날, 1928년 1월 1일 그는 한국인 방삼덕 빈첸시오 수사(方三德, 1898-1970)와 종신서원을 했다. 그의 유능함은 덕원에서 빛이 났다. 그는 덕원에서 구둣방 뿐 아니라 한국인 평수사 지원자 책임과 인쇄소 책임을 맡았으며 수도원 운전기사 노릇까지 하였다. 특별히 인쇄소는 그의 주된 소임이었다. 그는 식자, 인쇄, 제본까지 맡아서 많은 책을 간행했다. 인쇄소는 번창하여 1937년 새로운 작업장을 마련하였고, 1940년에는 새 인쇄기를 들여놓았다. 1940년 보고에 따르면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 천주교 교리문답 3만부, 미사경본 1만부가 발간되었고 호교론에 관한 책이 5천부 가량 팔렸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 인쇄소 때문에 그는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그리스도인들은 생존을 걱정했다. 1948년 12월 원산 내무서는 밀주 제조와 탈세 혐의를 씌워 다 고베르트 엔크 당가 신부를 체포했다. 그러나 더심각한 문제는 1948년에서 1949년으로 넘어갈 무렵 인쇄소에서 발생했다. 어느 날 직원 하나가 종이를 가득 담은 자루를 질질 끌고 산으로 가는것을 힐라리오 호이스 수사가 보고 루도비코 수사에게 알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다. 3월 중순에 직원 둘이 잡혀갔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유인물을 인쇄했다는 혐의였다. 이어서 4월 28일 현장책임자 루도비코 수사가 체포되었다. 모든 게 보위부가 꾸민 흉계였다. 반공주의자로 가장한 정치보위부원들의 꼬임에 인쇄소 직원들이 넘어간 것이다.

이 일을 빌미로 덕원 수도원은 공산정권을 전복하려는 불순분자들의 집단으로 공공연하게 낙인찍혔다. 결국 5월 9일과 11일 정치보위부원들이 두 차례에 걸쳐 수도원을 수색하였고, 독일인 수도형제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을 체포하여 평양 인민 교화소로 보냈다. 루도비코 수사는 4월 28일에 이미 평양으로 압송되어 독방에 갇혔고, 나중에 잡혀온 수도형제들과 전혀 접촉하지 못했다. 한참 뒤 그에게 세탁사역이 부과되었다.하루는 힘든 일을 하다가 양말이 완전히 찢어지자 그 꼴이 초라해 간수에게 부탁했다. “대우가 뭐 이렇습니까? 우리 집으로 소식을 전해 주면 내게 필요한 더 많은 것을 보내줄 것입니다. 소식 좀 전해 주십시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덕원 수도원 폐쇄 사실을 전혀 몰랐다. 수도원 자기 방에 십자가 대신 김일성 초상화(북한 공산당국은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를 접수하고 그곳에 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현 원산농업대학)를 설치하였다.)가 걸려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와 유죄판결을 받은 7명의 수도형제들은 평양 인민 교화소에 계속 수감되었고, 나머지 수도형제들은 1949년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후 그의 신상에 대한 소식은 임근삼 콘라도(林根三, 1919-1986) 수사에게 몰래 보낸 쪽지 편지가 전부이다. “임 수사 앞, 많이 감사합니다. 나는 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루도비코 수사가 썼습니다. 루도비코 수사 O.S.B.” 그게 마지막이었다. 6.25전쟁이 터지고,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직전인1950년 10월 11일 아침, 그는 어디론가 끌려 나갔는데 살해되었음이 분명하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분도 2010년 겨울호 8-9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4) -부 일데폰스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부 일데폰스 수사

 

부 일데폰스(Ildefons Flötzinge, 富, 1878-1952) 수사는 1878년 7월 20일 뮌헨-프라이징München-Freising 교구의 트로스트베르그 근교의 타이딩Teiding에서 태어나 안드레아스Andrea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농사를 지으며 살던 그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플뢰칭어와 어머니 안나 플뢰칭어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공일을 배웠다. 도제徒弟교육을 마치고  소목장(小木匠, 가구를 짜는 목수) 장인 시험을 통과한 후 1904년부터 포르츠하임Pforzheim의 가톨릭 장인 연합회(Katholishcen  Gesellen-Verein)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2년간의 청원기를 거친  후, 1907년 10월 4일 일데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 하였다. 1909년  10월 10일 첫서원을 발한 후 겨우 4주 만에 선교지로 파견되었다. 그가 배정받은 선교지는 당시 새 수도원 설립 준비가 한창이던 한국이었다. 11월 7일 그는 2명의 신부와 4명의 수사로 구성된 한국 진출 제1진에 속하여 서울로 파견되었다. 12월 28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수도원 부지와 함께 매입한 한옥에 목공소를 차리고 실습생들을 가르쳤고, 수도원 건축공사에 참여해 목공일을 맡았다. 그의 야무진 일솜씨는 한때 명동 성당 안에 설치되었던 강론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1915년 뮈텔 주교의 주교성성 은경축을 기념하여 그가 실습생들과 함께 만든 것이다. 1912년 11월 24일 그는 서울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발했다. 서울 백동 수도원 연대기에서 목수로, 때로는 대장장이로 등장하는 그는 유능했고 많은 일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면서 수사들이 중국 청도靑島에 있는 독일군 부대로 징집되었으나,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아빠스가 현지의 독일군 사령관에게 전보를 보내 그를 징집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베네딕도회에 선교가 위임되면서, 그의 활동 반경은 수도원 밖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원산 대목구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성당과 사제관, 학교를 지어야했다. 거의 모든 본당 연대기에는 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1927년 덕원에 들어선 새 수도원 건축공사에도 그의 땀방울이 스며들어있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의란依蘭 지목구를 1935년 카푸친 작은 형제회 북티롤 관구로 넘길 때, 그는 1932년 대홍수로 부서진 부금富錦 본당을 바닥부터 지붕까지 완전히 새로 고쳐 지었다. 베네딕도회가 다 부서진 성당을 넘겨주었다는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후에도 그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명령으로 의란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원들을 도와 성당과 사제관을 건축하였다. 1938년 덕원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로마의 카푸친 작은 형제회 총장으로부터 감사의 편지와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명예회원으로 이에 상응하는 이익과 특권을 수여한다는 증서를 받았다.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면서 그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수용소 생활을 같이 했던 디오메데스 메퍼트(Diomedes Meffert, 1909-1998) 수녀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구금생활을 비교적 잘 견뎌냈으며, 내가 수용소에 왔을 때에는 활발하고 일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는 발명에 재능이 많았고, 쓸모 있는 연장을 만들어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 나갔다. 1949년 가을, 처음으로 푸른 솜옷을 입게 되었을 때 그는 말했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나를 푸른 옷을 입은 채로 매장하시오. 나는 주님 앞에 가서 말할 것이오. 당신이 일데폰스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당신의 이 늙은 일데폰스를 보시오!’ 늙은 수사는 중국 땅에서 경미한 뇌일혈로 병자 도유성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만포 시기의 고난을 잘 견디어 냈다. 수용소로 돌아와서 그의 기운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편집자 주 : 6.25전쟁 중 인민군이 연합군에게 밀리고 있을 때, 옥사덕 수용소 수감자들은 압록강을 넘어 중국 집안시로 갔다가 만포로 이동하였다.) 처음 몇 달 동안 여기저기서 일을 했다가, 기운이 다하자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는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묵주기도를 드렸다. 정신도 가물가물 해졌고,밤에는 종종 헛소리를 해서 동료들을 깨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안셀모 신부보다 먼저 사망할 것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그는 용케 겨울을 견디어 내고 1952년 3월 20일 평화롭고 고요하게 사망했다.”

자료출처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북한에서의 시련(분도 출판사), 분도통사(분도출판사)

분도 2009년 겨울호 26-27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3) – 합요섭 요셉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함요섭 요셉 수사

 

함요섭 요셉(Josef Grahamer, 咸要燮, 1888 – 1950) 수사는 1888년 6월 1일 뮌헨-프라이징München-Preising 대교구 아이젠호펜Eisenhofen에서 태어났고 벤노Benn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고, 세상에 태어난 지 넉 달 만에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결국 여섯 자녀의 양육은 전부 어머니에게 맡겨졌다. 어머니의 굳은 신앙은 가족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자녀들의 모범이 되었다.자녀들 중 넷이 수도성소를 받았다. 아들 둘이 딜링엔Dilligen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그리고 다른 아들 둘은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학비가 없었기 때문에, 재봉 견습생이 되었고 임시로 여러 직종의 도제徒弟로 일하였다. 1906년 10월 21일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자기 형, 클라버(Petrus Claver Grahamer, 1883-1940, 1909년 사제서품) 수사의 첫서원 예식에 참여한 후 수도원에 입회할 결심을 했다. 서원식에서 돌아온 후 불과 열흘 만에 그는 입회 청원서를 작성했다. “저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기로 확고히 결심하였기 때문에 저를 받아주시기를 겸손하게 청합니다. 이미 3년 전부터 예수 성심과 선교에 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려는 강한 충동을 느꼈으나 제가 너무 어렸고 최근에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이 원의를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회복하였고 하느님께서 저를 시험하셨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결심은 더욱 확고하고 수도생활에 제 마음이 더욱 끌리기 때문에 오직 수도회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 성심과 사랑하올 천상 모후께 온전히 제 자신을 맡겨드리며, 수도원에 즉시 받아들여지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비천하고 충실한 벤노 그라하머 드림”

1908년 그는 요셉이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였고, 1910년 10월 16일 첫서원을 발했다.첫서원을 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1911년 1월 7일 그는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어 막 기틀을 잡아가던 서울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계속하였고, 1913년 3월 23일 종신서원을 발하였다. 그는 재단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수도복과 제의 제작을 담당했으며, 수도원 재봉실에서 견습생들을 가르쳤고, 문간도 맡아 보았다. 그 다음 그는 병실 간호 책임자가 되었고, 수도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그의 솜씨를 보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 엇갈린 반응을 보이던 인근 주민들이 점차 그를 신뢰했고, 몇 몇 환자들은 요셉 수사의 자애로운 봉사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눈을 떴다.

그가 받은 치유의 은사는 서울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긴 후에 제대로 빛을 내었다. 경성 제국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장의 추천을 받아 3년 동안 내·외과 진료를 할 수 있는 면허를 취득한 그는, 1928 년 초 당국의 허가를 받아 수도원 내에 진료소를 열었다. 후일 경성 제국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 외과과장의 협조로 서울에서 임상경험을 쌓은 요셉 수사는 김재환 플라치도(1890-1962) 수사를 조수

로 삼아 수도원 인근의 가난한 이들을 치료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의 의료 활동에 대하여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멀리서도 온 환자를 포함해 일 년에 약 18,000명의 환자들이 요셉 수사를 찾아왔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세를 줌으로써 하늘의 문을 열어 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무료로 나눠주었기 때문에, 진료소 운영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무척 컸지만, 요셉 수사는 20년이 넘게 사랑의 의술을 펼쳤다.

8.15 광복 후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면서 공산주의가 북한에서 득세하였다. 1946년 무렵에 연길 수도원은 이미 중국 공산당에 의하여 폐쇄되었다. 덕원 수도원 선교사들은 삼엄한 통제와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948년 12월 요셉 수사는 가중되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겨우 일어났다. 1949년 4월 28일 요셉 수사는 한국인 간호부를 학대했다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 1949년 5월 8일 밤부터 10일까지 북한 정치보위부는 두 차례에 걸쳐서 수도원을 점거하여,독일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을 체포하였고, 이들을 평양 인민교화소로 이송하였다.

요셉 수사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사방 2.5m×3m 크기의 좁은 감방에 갇혀 5개월 동안 혹독한 수감 생활을 하였다. 역경 중에도 그가 보여준 아름다운 형제애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요셉 수사는 루페르트 클링자이스(Rupert Klingseis, 吉世東, 1890-1950) 신부가 임종할 때 찬 몸을 덥혀주기 위하여 그를 꼭 껴안고 있었다. 요셉 수사는 체포 당시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5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은 다른 수도형제들과 교화소에 계속 수감되었고, 나머지 수도형제들은 1949년 8월 자강도 전천군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교화소에 수감 중이었으나, 1950년10월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할 무렵, 퇴각을 서두르는 북한 인민군에게 10월 3일과 4일 사이에 총살당했다.

자료출처: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북한에서의 시련(분도 출판사)

분도 2009년 가을호 30-31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2) – 엄광호 다고베르트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엄광호 다고베르트 신부

 

엄광호 다고베르트(Dagobert Enk, 嚴光豪, 1907-1950) 신부는 뮌헨München 교구 성 마르가레트St. Margareth본당 출신으로 1907년 9월 15일에 태어나 오토 프리드릭Otto Friedrich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이름은 에두아르드Eduard이고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 안나Maria Anna였는데, 아버지는 상업에 종사하였다. 어린 시절 그는 몇 해 동안 이스마닝Ismaning에서 자라다가 1914년부터는 프라이부륵Freiburg으로 가서 할아버지 댁에 살며 학교를 다녔다. 1917년부터 그는 프라이부륵의 베르톨트Berthold 김나지움에서 공부하다가 1923년에 뮌헨으로 이사한 이모를 따라가서 비텔스바허Wittelsbacher 김나지움에서 중등교육을 마쳤다. 그 후 그는 부모들이 바라는대로 잉골슈타트Ingolstadt 인근에 있는 오버하운슈타트Oberhaunstadt에 있던 외숙부에게 갔다. 그의 외숙부인 아우구스트 비트만August Wittmann은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정부에서 농업자문관 (Ladesökonomierat) 칭호를 받은 지역유지였다. 외숙부 밑에서 그는 농업기술을 배우는 견습생으로 지냈는데, 1927년 4월 1일에 작성된 보고문에는 그에 대한 평판이 매우 좋게 적혀 있다. “엔크군은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성실하게 해냈으며, 매사를 꼼꼼하게 처리했으며, 특히 장부정리를 빈틈없고 믿음직스럽게 해냈다.”

비텔스바허 김나지움의 종교담당 교사는 그의 내면적 삶과 관련하여 더 중요한 부분들을 알려 주었다. “프라이부륵 학생연합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 학생은 뮌헨에 와서도 신독일 청년회(Übungen von Neudeutschland)의 모든 신심활동에 참여했다. 신앙이 매우 깊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모든 신심활동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과 열의를 보였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사제성소, 수도성소와 선교활동에 대하여 말해왔다.그의 정신, 모범적인 생활, 순종적인 자세, 절도 있는 태도,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친절, 이기적이지 않은 처신, 성소에 대한 이상적인 지향, 초지일관하는 모습을 감안해 볼 때, 나는 그가 수도성소에 불리었고 선교활동에도 적합하다고 여겨지는데, 다만 그 생활을 감당할 만큼 건강이 요구된다.”

종교담당 교사가 한 이 말은 그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1927년 5월 중순 그는 다고베르트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1928년 5월 14일 그는 첫서원을 발했고, 1931년 5월 17일에 종신서원을 했다. 1933년 3월 26일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성당에서 아욱스부륵Augsburg 교구장 요세프 쿰프뮐러(Josepf Kumpfmüller, 1869-1949)주교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이듬해인 1934년 4월 2일 그는 덕원 수도원으로 선교 파견되면서, 수도자, 사제 그리고 선교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시절의 꿈을 모두 이루었다.

1934년 10월 초순. 덕원 수도원에 도착한 그는 우선 말공부에 전념하면서 도서관 정리와 예절지기를 맡아보았다. 관리와 경리 분야에서 실무 능력을 갖추었고, 또한 성숙한 인간미를 겸비한 그는 1935년 5월 연례피정이 끝난 후 당가와 식당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수도원 살림을 꾸려가면서 덕원 수도원 소속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있는 원산 대목구 내 본당의 갖가지 요구들도 채워 주어야 했다.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업가들 및 고용인들을 수시로 접촉해 가며 비교적 빠르게 업무에 적응해갔다. 그는 맡은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려고 노력했고, 수도형제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자 했다. 만일 필요한 것이 준비되지 못하면 그는 항상 따뜻한 말로 그들에게 응했다. 수도원 살림을 책임진 당가로서 그는 아주 엄격하게 스스로를 통제하였다.

8.15 광복 후 북한에서 정권을 잡은 공산당은 덕원 수도원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정치 보위부에 수도원을 폐쇄하고 몰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들은 우선 1948년 12월 1일 수도원 당가인 다고베르트 신부를 포도주 불법 제조 및 탈세 혐의로 체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적발한 포도주는 그해 여름 농업조합에서 수도원 측에 요청하여 담가놓았으며, 이는 조합 측에서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한 일이었다. 공산당이 짜 놓은 각본에 걸려든 다고베르트 신부는 원산으로 압송되었고, 미결상태로 구류를 살았다. 수도원에서는 그를 석방시키려고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그는 1949년 5월 9일 덕원 수도원이 폐쇄된 후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평양 인민교화소로 이송되었다. 결국 그는 밀주제조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그는 유죄판결을 받은 다른 7명의 수도형제들과 함께 평양 인민교화소로 수감되었다. 반면에 그밖의 수도형제들은 1949년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떠났다. 그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그는 교화소에 수감 중이었으나 국군이 평양을 탈환할 무렵, 퇴각을 서두르는 인민군에 의해  1950년 10월 3일 총살당했다.

자료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 교회사 연구소),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분도 2009년 봄호 20-21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11) – 민종덕 고트리프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민종덕 고트리프 수사
덕원 수도원, 1887년 10월 25일 생, 독일 아이슈테트 교구 출신
세례명: 세례자 요한
첫서원: 1909년 10월 10일
한국 파견: 1914년 5월 3일
소임: 건축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2년 4월 6일, 옥사덕 수용소

 

민종덕 고트리프(Gottlieb Auer, 閔鍾德, 1887-1952) 수사는 1887년 10월 25일 독일 아이슈테트Eischtätt교구의 라우터호펜Lauterhofen에서 소농인 부친 미카엘 아우어와 모친 카타리나 아우어 슬하에 태어나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 형제와 세 누이와 함께 성장했다.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일찍부터 농업 말고 다른 직업을 가져야 했다. 그는 목공기술을 배워 가족을부양하다가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 입회하여 1907년 10월 4일 고트리프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09년에 첫서원을 한 그는 1913년에는 종신서원을 발하고, 그 이듬해 1914년 5월 3일 서울 백동 수도원으로 선교 파견되었다.

그는 5월 16일 게르마누스 하르트만(Germanus Hartmann, 1883-1931) 수사와 바실리우스 하우저(Basilius Hauser, 河連根, 1886-1950) 수사와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숭공학교에서 목공을 가르치기로 내정되어 있던 그는 선교지에 도착하자마자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에 휩쓸리고 말았다. 1914년 8월 7일 파스칼리스 팡가우어(Paschalis Fangauer, 1882-1950) 수사, 오이겐 오스터마이어(Eugen Ostermeier, 吳利根, 1885-1949) 수사, 야누아리오 슈뢰터(Januarius Schrötter, 楊聖基, 1880-1960)수사와 함께 중국 청도의 독일군 진지로 징집되었다. 보병으로 복무하던 그는 청도 진지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오이겐 수사를 제외한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포로로 잡혀 일본 각지를 전전하며 수용소 생활을 했다. 고트리프 수사에게 수용소 생활이 무익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1919년 석방될 때까지 수용소에서 동료 포로에게 건축 설계를 배웠다.포로로 잡힌 수사들은 간호사로 일하거나 장교들에게 봉사함으로써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독일군 포로들은 대부분 독일 회사의 동아시아 지역 지점에서 일했던 직원들이었다. 수용소에서도 매달 정기적으로 봉급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포로들은 대부분 넉넉하게 생활했다. 그와 다른 수도형제들은 환자를 돌보거나 정원을 가꾸면서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들은 수용소에서도 선교사인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고 종종 냉담하고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권면하고 특히 임종에 처한 중환자들이 성사를 받게하였다.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을 때 그들은 상당한 액수의 돈을 가지고 수도원으로 돌아 왔다. 당시 서울 백동 수도원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서 자금지원이 끊긴 상태였으므로, 목공소 수입 말고는 다른 수입이 없었다. 그 일은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아빠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서울 백동 수도원에 사목권이 위임되자, 고트리프 수사는 원산 본당주임으로 임명된 안드레아스 엑카르트 (Andreas Eckardt, 玉樂安, 퇴회) 신부와 다른 동료 수사들과 함께 원산으로 가서 선교활동에 뛰어들었다. 1922년 그는 베드로 게르네르트(Petrus Gernert, 1882-1949) 수사와 함께 원산에서 기차로 25분 떨어진 문평에 학교를 지었다. 1923년에는 원산 해성학교 증축공사에 참여하였다. 이 공사에서 숙련된 목공기술자였던 그의 기여는 매우 컸다.물론 덕원 수도원 건축공사에도 그의 재능이 발휘되었다. 1926년 수도원 신축이결정되자, 그는 카예타노 피어하우스(Cajetan Vierhaus, 河, 1868-1936) 신부와 함께 수도원이 들어설 터를 측량했다.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진 후 고트리프 수사는 수도원 내에 머물면서 선교사업 홍보용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는 일부러 먼 산길로 돌아다니며 수도원 사진을 엄청나게 찍었다. 그가 찍은 덕원 수도원 사진은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몇 초 동안 공중으로 떠오르다 곧 사라지는 기관차의 증기구름까지 카메라에 담았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건강이 약해서 자주 아팠다. 특히 겨울에는 자주 병상에 누워야했다.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면서 고트리프 수사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는 덕원에서부터 건강하지 못했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절제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오래 버텼다. 가끔 그는 들일에도 참가했지만 대부분, 특히 만포 시기에는 부엌과 난방에 쓸 나무를 자르고 쪼개는 일을 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약해진 건강에 주의하며 때로는 휴식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고, 비가 오는 날에는 집에 있을 수도 있었다. 디오메데스 메페르트(Diomedes Meffert, 1909-1998) 수녀는 그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진료 외에 여가가 생기면 가끔 그의 톱질을 도왔다.그는 내게 톱질과 곡괭이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두 번째 숯가마가 가동 중이던 1952년 4월4일, 눈이 내렸다 녹았다 하는 날씨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벌채를 하러 갔다. 눈보라가 심했고, 눈 녹은 물이 짚신을 적셔 젖은 발로 덜덜 떨며 일을 했다. 동료 수도자들이 일찍 일터를 떠나라고 충고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다음 날 고열과 옆구리 통증이 엄습했다. 폐렴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백약이무효였다. 심장은 주사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4월 6일 그는 평온하게 잠들었다. 조용하고 섬세하며, 겸손하고 소박한 그의 성품은 내게 늘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분도 2011년 여름호 26-27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0) – 길세동 루페르트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길세동 루페르트 신부

 

길세동 루페르트(Rupert Klingseis, 吉世東, 1890-1950)신부는 독일 뮌헨München 교구 마리아 힐프Maria Hilf 본당 출신으로, 1890년 1월 5일에 태어나 요셉 Josef 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1904년부터 마인Main 강변에 위치한 상트 루드빅St. Ludwig 소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김나지움으로 옮겨 최고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10년 가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한 그는 1년간 법정 수련을 받고 1911년 10월 8일 첫 서원을 했다. 그 후 로마 성 안셀모St. Anselmo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15년 7월 16일 딜링겐Dillingen 신학교에서 아욱스부륵 교구장 링그(Maximilian von Lingg, 1842-1930)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918년에는 뮌헨 대학교에서 베움커Bäumker 교수의 지도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철학 단과대학(연합회내의 독일출신 성직수사들을 위한 2년제 신학교로 철학과정만 설치되었다.) 에 학생들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여러 신학교로 출강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1922년부터 1930년까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철학 단과대학 학장직을 수행하면서 철학 강의를 하였으며, 5년간 수도원에서 부원장으로 봉사하였다. 1930년 덕원 신학교의 철학 교수로 있던 김시련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 Schmid, 金時練, 1883-1962) 신부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보좌 아빠스로 선출되어 독일로 돌아오자, 루페르트 신부가 그를 대신하여 1930년 11월 9일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15년 동안 덕원 신학교에서 철학, 라틴어, 교회사 등을 가르치며 신학생 양성에 매진하고 피정지도도 활발히 하였다. 1940년에는 국민 계몽 총서 제1권으로『인간의 영혼은 물질인가 정신인가』를 펴내기도 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매우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성무일도를 바치다가 갑자기 정전되어 성당이 깜깜해지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가 외우는 시편 소리만 성당에 울려 펴졌다. 반면에 일상사에 대한 상식은 전혀 없었다. 당시는 물품이 귀하던 시절이라, 신학교에서 교수 신부들이나 손님들을 위하여 짚신을 실내화로 대신 비치해 놓았는데, 그는 짚신을 어떻게 신는지 몰라서 항상 거꾸로 신고 다녔다. 그는 일에 매우 서툴렀는데도, 공동체 의식이 투철하였기 때문에 공동소임에 절대로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 당시에 밀을 수확하는 시기가 오면, 공동체 전체가 수도원 농장으로 나가 밀을 베었는데, 그도 항상 밀수확을 도왔다. 6월 하순이라 날씨가 더워서 멱을 감을 정도로 땀을 흘려가면서도 그는 싫은 내색하지 않고 일을 했다. 서투른 일을 너무나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다른 형제들이 아무리 말려도 공동소임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수도 형제들은 하는 수 없이 그가 일을 하도록 놔두었고, 대신에 한 명이 뒤를 따라다니며, 그가 해 놓은 일을 다시 고쳐 놓곤 했다. 덕원 수도원에서 그와 함께 생활했던 수도형제들은 그를 두고 기도하고 일하는 전형적인 베네딕도회 회원이라고 평했다. 그는 기도에 열심이었고, 학문 연구에도 매진하였다. 그는 학식으로 쌓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살면서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였다.

아는 바를 반드시 실천하고자 했던 루페르트 신부의 모범적인 삶은 어려운 시기에 수도원을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소련군의 진주와 북한 공산당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는 계속 운영되었고, 그 역시 철학강의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1949년 5월 9일 이른 새벽, 수도원을 포위한 북한 공산당원들에 의해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z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 홍태화 루치오(Luzius Roth, 洪泰華,189 0-1950) 원장 신부, 안세명  아르눌프(Arnulf Schleicher,  安世明,  1906-1952) 부원장 신부와 함께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었다. 1949년 8월 5일 덕원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에서 잡혀온 독일인 수도자들이 옥사덕 수용소로 떠났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7명의 수도형제들은 유죄판결을 받고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그가 받은 혐의는 반공산주의 책자 저술이었는데, 1940년에 저술한 책이 빌미가 되었다. 국제 신앙 기구(Agentia Internationale Fides)에 따르면, 루페르트 신부는 1950년 4월 6일 평양 인민 교화소에서 영양 실조로 사망하였고, 평양 교외의 묘지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와 함께 안장되었다.

자료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 교회사 연구소),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분도 2009년 봄호 20-2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