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4) -부 일데폰스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부 일데폰스 수사

 

부 일데폰스(Ildefons Flötzinge, 富, 1878-1952) 수사는 1878년 7월 20일 뮌헨-프라이징München-Freising 교구의 트로스트베르그 근교의 타이딩Teiding에서 태어나 안드레아스Andrea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농사를 지으며 살던 그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플뢰칭어와 어머니 안나 플뢰칭어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공일을 배웠다. 도제徒弟교육을 마치고  소목장(小木匠, 가구를 짜는 목수) 장인 시험을 통과한 후 1904년부터 포르츠하임Pforzheim의 가톨릭 장인 연합회(Katholishcen  Gesellen-Verein)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2년간의 청원기를 거친  후, 1907년 10월 4일 일데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 하였다. 1909년  10월 10일 첫서원을 발한 후 겨우 4주 만에 선교지로 파견되었다. 그가 배정받은 선교지는 당시 새 수도원 설립 준비가 한창이던 한국이었다. 11월 7일 그는 2명의 신부와 4명의 수사로 구성된 한국 진출 제1진에 속하여 서울로 파견되었다. 12월 28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수도원 부지와 함께 매입한 한옥에 목공소를 차리고 실습생들을 가르쳤고, 수도원 건축공사에 참여해 목공일을 맡았다. 그의 야무진 일솜씨는 한때 명동 성당 안에 설치되었던 강론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1915년 뮈텔 주교의 주교성성 은경축을 기념하여 그가 실습생들과 함께 만든 것이다. 1912년 11월 24일 그는 서울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발했다. 서울 백동 수도원 연대기에서 목수로, 때로는 대장장이로 등장하는 그는 유능했고 많은 일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면서 수사들이 중국 청도靑島에 있는 독일군 부대로 징집되었으나,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아빠스가 현지의 독일군 사령관에게 전보를 보내 그를 징집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베네딕도회에 선교가 위임되면서, 그의 활동 반경은 수도원 밖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원산 대목구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성당과 사제관, 학교를 지어야했다. 거의 모든 본당 연대기에는 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1927년 덕원에 들어선 새 수도원 건축공사에도 그의 땀방울이 스며들어있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의란依蘭 지목구를 1935년 카푸친 작은 형제회 북티롤 관구로 넘길 때, 그는 1932년 대홍수로 부서진 부금富錦 본당을 바닥부터 지붕까지 완전히 새로 고쳐 지었다. 베네딕도회가 다 부서진 성당을 넘겨주었다는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후에도 그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명령으로 의란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원들을 도와 성당과 사제관을 건축하였다. 1938년 덕원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로마의 카푸친 작은 형제회 총장으로부터 감사의 편지와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명예회원으로 이에 상응하는 이익과 특권을 수여한다는 증서를 받았다.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면서 그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수용소 생활을 같이 했던 디오메데스 메퍼트(Diomedes Meffert, 1909-1998) 수녀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구금생활을 비교적 잘 견뎌냈으며, 내가 수용소에 왔을 때에는 활발하고 일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는 발명에 재능이 많았고, 쓸모 있는 연장을 만들어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 나갔다. 1949년 가을, 처음으로 푸른 솜옷을 입게 되었을 때 그는 말했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나를 푸른 옷을 입은 채로 매장하시오. 나는 주님 앞에 가서 말할 것이오. 당신이 일데폰스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당신의 이 늙은 일데폰스를 보시오!’ 늙은 수사는 중국 땅에서 경미한 뇌일혈로 병자 도유성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만포 시기의 고난을 잘 견디어 냈다. 수용소로 돌아와서 그의 기운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편집자 주 : 6.25전쟁 중 인민군이 연합군에게 밀리고 있을 때, 옥사덕 수용소 수감자들은 압록강을 넘어 중국 집안시로 갔다가 만포로 이동하였다.) 처음 몇 달 동안 여기저기서 일을 했다가, 기운이 다하자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는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묵주기도를 드렸다. 정신도 가물가물 해졌고,밤에는 종종 헛소리를 해서 동료들을 깨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안셀모 신부보다 먼저 사망할 것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그는 용케 겨울을 견디어 내고 1952년 3월 20일 평화롭고 고요하게 사망했다.”

자료출처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북한에서의 시련(분도 출판사), 분도통사(분도출판사)

분도 2009년 겨울호 26-27 페이지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