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9) – 노병조 안셀모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노병조 안셀모 신부

 

노병조 안셀모(Romer Anselm, 盧炳朝, 1885~1951) 신부는 1885년 12월 7일 독일 로텐부륵Rottenburg 교구 잉어킹엔Ingerkingen에서 태어나 요셉Josef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마친 후 1907년 10월 20일 첫 서원을 하였다. 1911년 5월 3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곧 바로 조선으로 선교 파견되어 같은해 12월 11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입국 후 언어공부를 시작하였으나 당시에는 교재가 없어서어려움이 많았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기존의 불한佛韓 문법책을 토대로 독한獨韓 문법책을 만들어 등사판으로 간행하였다. 1910년 서울 수도원은 솜씨 좋은 장인을 길러내어 선교 사업에 이바지 한다는 목적으로 공업계 직업학교인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설립하였다. 숭공학교 초대 교장은 옥락안 안드레아(Andreas Eckhardt, 玉樂安,1884-1974) 신부가 맡았고, 안셀모 신부가 뒤를 이었다.

1921년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tius Sauer, 辛上院,1877-1950) 주교 아빠스가 그를 원산 대목구 부감목副監牧(총대리)에 임명하였다. 원산 대목구 소속신학생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필요하여 숭공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고, 1921년 11월 3일에 소신학교가 문을 열었으며 안셀모 신부는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23년 서울 수도원 원장을 맡고 있던 김시련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 Schimid,金時練,  1883-1962) 신부가 수도원 이전을 준비하기 위하여 원산 본당 주임으로 발령 나자, 안셀모신부는 원장직까지 수행해야만 했다. 원장으로재직하던 중 그는 1926년 3월에 간도間島에 있는본당들을 순방하였고, 훈춘琿春과 육도포六道泡 본당에서 견진성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1926년12월 초부터 시작한 새 수도원과 신학교 건축공사가 마무리 되자, 1927년 11월 17일 서울 수도원 수사들과 신학생들이 덕원으로 옮겨 갔다. 수도원 옆에 지어진 새로운 신학교는 1927년 12월1일에 성 빌리브로드를 주보로 삼아 축복식을 거행하고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 안셀모 신부는 신학교만 전담하게 되었고, 부감목과 원장 직책은크리소스토모 신부가 맡았다. 1929년 8월 중순그는6주 동안 일본을 방문하여 피정을 한 후 당시 일본 가톨릭의 중등학교를 둘러보고 한국인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그는 홍태화 루치오(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신부, 탁세영 파비아노(Fabian Damm, 卓世榮, 1900-1964) 신부와 함께 원산대목구 대표로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1931년에 개최된 전선주교회의全鮮主敎會議(지역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안셀모 신부는 북한 공산 당국에 의하여 덕원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하여 신학교 교장을 맡아 보면서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그는 신학생들의 학업, 영성, 건강 등을 꼼꼼하게 돌보았으나, 신학교 생활을 일일이 감독하지 않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할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그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의 쾌활한 웃음소리는 우울했던 학생들의 가슴을 활짝 열어주곤 했다. 그는 수도원에서성가대장으로 수십 년을 봉사했기 때문에 모든성가를 외우다시피 했지만, 매주 토요일마다 성가연습을 지도하면서“몰라서가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에서 연습시간을 갖는다.”라고 말했다고한다. 자신이 음악을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음악활동을 권장했다. 그때문에 여가 시간이 되면 신학교 전체가 악기 소리와 성가 소리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가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 덕원 신학교는 많은 발전을 보았다. 1929년 9월에 철학반이 개설되어 대신학교 교육과정이 시작되었다. 1933년 3월 17일에는 교지인『神友』신우가 창간되었다. 덕원 신학교는 그때까지 일제 당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설립인가를 받지 않은 채 운영되고 있었다. 1933년부터 조선 총독부는 인가 절차를 밟으라는 통보를 했고, 이를 위해 안셀모 신부는많은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1935년 2월 10일 공식적인 신학교 설립인가가 떨어졌고 5월 14일 성대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일제 당국으로부터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덕원 신학교는 태평양전쟁(1941-1945) 와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 중에 일제는 서울 용산 성심 신학교와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강제로 폐교시켰는데, 덕원 신학교는 두 신학교의 신학생들을 위탁하여 교육함으로써 끊길 뻔 했던 신학교육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6년 사제 서품 25주년을 맞은 안셀모 신부는 그 동안 쉬지 않고 활동한 탓에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기 위해 여름 방학동안 마닐라로 휴가를 다녀왔다. 1938년 9월 23일 화재로 신학교 건물이 전소되어 복구해야만했고 태평양전쟁 막바지인1945년 5월에는 신학교 건물이 일본군에게 징발당하여 노심초사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8·15 광복 후 북한 지역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1949년5월 9일에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홍태화 루치오 원장신부,  부원장 안세명 아르눌프(Arnulf Schleicher, 安世明,  1906-1952) 신부, 신학교 철학교수 길세동 루페르트(Rupert Klingseiz, 吉世東,1890-1950) 신부 등이 체포되자 그는 수도원의 임시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그 역시 5월 11일에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에 갇혀 있다가 자강도 전천군慈江道 前川郡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수용소의 노동과 굶주림 등으로날로 쇠약해진 노 안셀모 신부는 설사병과 수종水腫 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1951년 11월 9일 사망하여, 옥사덕 수용소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묻혔다.

자료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 교회사 연구소),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분도 2008년 겨울호 30-31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8) – 파스칼 팡가우어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파스칼 팡가우어 수사
1882년 1월 8일 생, 독일 레겐스부르크 교구 출신
세례명: 세례자 요한
첫서원: 1907년 10월 20일
한국 파견: 1909년 11월 7일
소임: 백동과 덕원 수도원 농장 및 정원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원산 본당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4월 16일, 옥사덕 수용소

 

파스칼 팡가우어Paschalis Fangauer 수사는 1882년 1월 8일 독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교구의 쾨퍼링Köfering 본당에 속한 엑글핑Egglfing에서 소농이었던 아버지 미카엘과 어머니 마리아 슬하에서 태어났다.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는 11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독실한 부모 밑에서 충실하게 신앙을 배우며 자라났다. 그 덕분에 5명의 형제자매들이 성소를 받았다. 누나 블라시아Blasia 수녀, 여동생 멜리타Melitta 수녀와 에르멘프리다Ermenfrieda 수녀는 수도성소를 받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있는 수녀회에 입회했고, 모두가 각자의 수녀원에서 원장으로 봉사했다. 철학·신학 박사였던 동생 게오르크Georg 신부는 살레시오회 헌신자로 미국에서 본당신부로 활동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형 미카엘이었다. 미카엘은1900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바르나바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생활을 하였다. 바르나바 수사는 모범적인 수도자였고, 30년이 넘도록 수도원 정원관리를 담당했다.

쾨퍼링 본당 주임신부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아빠스에게 쓴 편지는 젊은 파스칼 수사가 어떻게 성소를 택하기로 결심했는지 보여준다. “제게 이야기한 대로요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유혹으로 인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어렵지만, 그는 양심의 보호를 받아서 자기 형처럼 세상과 결별하기를 원합니다. 요한은 훌륭한 청년으로 정말 순수합니다. 더군다나 성격도 밝고 쾌활합니다.” 또한 그가 수도원에 제출한 입회청원서를 보면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원의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수 있다. “불쌍하고 약한 죄인이 높으신 분의 인도를 받아 심사숙고한 결정에 겸손하게 순종하고,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당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수도원에 받아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하셨듯이 저를 불쌍하게 여겨 주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요청을 수행하도록 제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고, 언젠가 그분의 자비로 제가 ‘오너라!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저의 진정하고 분명한 원의입니다.”

1905년 10월 15일, 그는 파스칼이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07년 10월 20일, 첫서원을 발한 그는 수도원에서 형인 바르나바 수사를 도우며 정원에서 일했다. 수도원에 입회 하기 전부터 이미 그는 정원사 조수로 일했고 바이에른 주 정원사 협회에서 주는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1909년 11월 7일, 27세의 파스칼 수사는 2명의 신부와 4명의 수사로 구성된 한국진출 제1진에 포함되어 서울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듬해부터 서울 백동 수도원에 과수원과 농장을 일구었고 조경공사를 했다. 1911년 종신서원을 발한 그는 숭공학교에서 원예과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국 청도靑島 로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되어 1914~1920년까지 일본에서 수용소 생활을 겪기도 했다. 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자 서울 수도원 수도자들이 선교현장에 뛰어들었고, 그도 1923년 원산본당으로 발령 났다. 그는 1949년까지 그곳에 기거하면서 역시 농장과 과수원을 일구었다. 특히 그는 채소와 과일을 많이 재배하였으며 당시에는 비싸고 귀한 작물이었던 포도를 재배하여 팔기도 하였다.

1949년 5월 11일 밤 파스칼 수사는 원산 본당에서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북한 공산당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바로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덕원 수도원에서 체포된 독일인 수도형제들과 함께 평양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는 원산에서 이미 위염을 앓고 있었지만 평양 인민 교화소와 옥사덕 수용소의 거친 음식을 이겨냈다. 옥사덕에서 그는 부엌과 방의 땔감으로 쓸 섶나무를 묶는 일을 했다. 그는 아주 열심히 신체를 단련하였는데, 밤마다 얼음장 같은 개울물로 목욕을 했다. 냉수마찰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는 한동안  수용소 생활을 잘 버텼다. 그러나 만성설사, 복부팽만, 심장마비 같은 증세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몇 주 동안에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훌륭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휴식과 명상의  시간을 허락하심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번 표현하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 아주 만족해했고, 병자성사를 받은 후에 주님의 부르심에 영원히 따를 준비를 하였다. 그는 1950년 4월 16일 사백주일(부활 후 첫 주일)에 선종하여 옥사덕 수용소에 묻혔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원산수녀원사(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1988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분도 2010년 가을호 8-9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7) – 나국재 카누토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나국재 카누토 신부

 

나국재 카누토(Canut Graf des Enffans d’Avernas, 羅國宰, 1884-1950) 신부는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의 그라쯔-세카우Graz-Sceckau 교구 쉬름도르프Schirmdorf에서 태어나 베네딕트Benedikt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쉬름도르프는 현재 슬로베니아의 무르스카 소보타Murska Sobota 교구에 속하며, 아파체Apace라고 불린다. 귀족 혈통을 이어받은 그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영주가문 태생이다. 브뤼셀 인근에 터를 잡았던 그의 가문은 18세기에 오스트리아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하인리히Heinrich백작이었고, 어머니는 안나 그레핀 플라쯔Anna Gräfin Plaz 백작부인이었다. 그의 부모는 슬하에 아들 삼형제를 두었으며, 두 아들 베네딕트와 클레멘스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한국으로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하다가 모두 한국에서 선종하였다. 나머지 아들 브루노는 보이론 연합회의 세카우 수도원에 입회하여 브라질에 새로 설립된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 그의 생애에 대하여는 그가 쓴 서신들을 통하여 추정할 뿐이다. 그는 펠트키르히Feldkirch에 있는 스텔라 마투티나(Stella Matutina, 새벽별 – 성모님의 별칭) 김나지움에서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하다가 1906년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티롤지방에서 소위로 군복무를 했다. 1911년 3월 22일에 그가 쓴 한 편지에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으로부터 입회허락을 받았으며, 펠트기르히에서 피정을 마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몇 주간의 청원기를 거쳐 카누토라는 수도명으로 수련기를  시작하고 1912년 7월 28일 첫서원을 발했다. 딜링엔 신학원과 뮌헨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친 그는 1914년 8월 13일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그는 종신서원을 하기도 전에 사제품을 받고 군종신부로 참전했다. 그는 이듬해 8월 27일에 종신서원을 발했다. 1921년 1월 16일 카누토 신부는 한국으로 선교 파견되었다. 그의 동생 레오폴드(Leopold Graf des Enffansd’Avernas, 羅碧宰, 1887-1944) 신부는 1913년부터 서울 백동 수도원에  파견되어 살고 있었다.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카누토 신부는 5월경 북간도 삼원봉三元峰 본당에 제3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당시 함경도와 북간도 지역을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인수받은 백동 수도원에 사제수가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되어 그는 원산 본당 보좌신부로 발령이 났다. 원산에서 2년 동안 전교 활동을 한 그는1923년 8월 내평內坪 본당으로 부임하여 임시 주임을 맡다가 곧 제10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내평에서 그는 꼬박 11년간을 사목했다. 내평 본당은 1887년 설립된 안변 본당의 후신이다. 본당은 1896년 2월 내평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경원선 철도가 개통된 이래 내평보다는 신고산역 지역이 발전하게 되었고, 따라서 전교 활동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그는 신고산역 인근에 있던 가옥들을 매입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한 뒤 1930년 초반에 본당을 이전했다. 이때부터 이 본당은 ‘고산高山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심장과 신장에 큰 무리가 와서 사목활동을 하기가 어려워진 그는 1934년 7월경 고산을 떠났다. 그는 원산 본당에 머물며 진료를 받았고,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 원산 수녀원에 가서 미사를 드려주었다. 그 해 12월 초 그는 요양을 위해 필리핀의 산 베니토San Benito 수도원으로 떠났다가 원기를 회복하고 1935년 10월 5일 원산으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9년 동안 원산 수녀원에서 수녀들의 영성생활을 지도하다가 1943년 6월13일 덕원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면서 카누토 신부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는 옥사덕으로 올 때에 소를 타고 올 정도로 기력이 쇠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수용소에서 온 힘을 다해 농사일과 부엌일을 도왔다. 이듬해  6.25전쟁이 터졌고, 초반에 승기를 잡았던 북한군이 연합군의 공세에 밀리게 되자, 그와 동료들은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겪어야만 했다. 죽음의 행진은 10월 25일 만포滿浦에 이르렀다가 국경을 넘어 10월 27일 만주로, 다시 만포로 이어졌다. 그는 압록강을 건널 때부터 기력을 잃어 거적 속에서 정신없이 누워 있다가 11월 6일 선종했다.  그와 함께 죽음의 행진을 했던 디오메데스 메퍼트(Diomedes Meffert, 1909-1998) 수녀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증언했다. “길가에서 죽고 싶지 않으면 계속해서 걸어야 했다. 만포로 되돌아오는 길에 환자들은 트럭을 타고 오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혹독하게 추운 밤을 들판에서 계속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은 걸어서 만포 감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러한 고난은 카누토 신부의 체력을 매우 떨어뜨렸다. 그는 병자성사를 받고 나서 고통 없이 조용히 사망했다. 다음날까지 우리는 그가 짧은 잿빛의 죄수복을 입고 머리엔 통나무를 벤 채 빈 옆방의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봐야만 했다. 우리는 그렇게 처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 퍼진 고귀한 평온함과 숭고함에 감동받았다. 다음날 한국인 포로들이 와서 시신을 가지고 갔다. 나중에 이 포로 중 한 사람이 우리 신부에게 그가 매장되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북한 정권은 우리가 북한을 떠나기 전에 만포에서 사망한 다른 사람들의 유골과 함께 카누토 신부의 유골을 새 무덤으로 이장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원산수녀원사(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1988년)

분도 2010년 여름호 8-9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6) – 김동철 마르코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김동철 마르코 신부

덕원-함흥 교구, 1913년 1월 3일 생, 부산 영주동
세례명: 마르코
사제 서품: 1943년 3월 6일
소임:  덕원 신학교 교수, 평양 대목구 안주 본당과 비현 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1950년 6월 27일, 평양 대목구 비현 본당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신의주(추정)

 

김동철 마르코(金東哲, 1913-1950) 신부는 1913년 1월 3일 부산시 영주동에서  김성준 요셉과 박부경 벨다 슬하의 일곱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대구 대교구  김동언(金東彦, 1898-1981) 신부가 그의 친형이다.그는 병인박해 순교자 가운데  한 분인 남종삼 요한 성인의 후손인데, 그의 어머니가 남종삼 성인의 손녀이다.  언양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중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와세다 대학 전기공학과에 진학했다. 와세다 대학에 다니던 그는 도쿄 대교구장 샴봉(Jean-Baptiste-Alexis Chambon, 1875-1948) 대주교의 비서 겸 주교관 수위로 일했다. 그런데 주교관에서 일본을 여행 중인 덕원 수도원의 파비아노 담(Fabian Damm,卓世榮,  1900-1964) 신부를 만난 것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덕원 신학교에 입학했다.

덕원 신학교를 졸업한 김동철 마르코 신부는 1943년 3월 6일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서품 직후  모교인 덕원 신학교 교수 신부로 발령을 받아 재직하면서, 함흥 본당 신부가 여행 중이거나 부재중일 때에는 그곳에 가서 사목활동을 돕기도 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미국인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하는 정책을 감행하였다. 이에 1942년 6월 1일 평양 대목구장 윌리엄 오셰아(William F. O’Shea, 1884-1945) 주교를 비롯한 메리놀회원 전원이 본국인 미국으로 송환되었고, 평양 대목구장직은 새로 주교로 서품된 노기남(盧基南, 1902-1984)경성 대목구장이 잠시 겸직했다가, 1943년 3월 9일 홍용호(洪龍浩, 1906-?) 프란치스코 신부가 평양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홍 프란치스코 주교는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각 교구에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다.김동철 마르코 신부는 덕원 면속구에서 평양 대목구로 파견되어, 1944년 11월부터 평안남도 안주(安州) 본당의  제6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946년 10월까지 사목하였다. 1945년 4월 9일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초대하여 분원을 설립토록 하였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갖가지 제약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일 수 없었지만,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자들에게 자치 능력과 자급자족 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손수 농사를 짓는 한편 염소를 키우기도 하였으며, 나무키우기에도 열성이어서 비가 오면 신자들과 수녀들까지 묘목 심기에 동원하는 등 많은  힘을 쏟았다. 해방 후 본당에 ‘우리말 공부 교실’을 개설하여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

1946년 10월에 김동철 마르코 신부는 평안북도 비현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어 1950년 6월 27일까지 사목했다. 1947년 초, 본당에서 운영하던 성심학교 교사를  비현면 인민위원회가 징발하려하자 이에 저항하다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종교교육을 한다는 고발로 체포되어 의주군 내무서에 삼 일간 구금되기도 하였는데, 끝내 성심학교는 폐교되고 인민위원회에 강제 몰수되고 말았다. 이 일뿐 아니라 그는 공산당에게 갖가지로 시달림을 받느라 사목활동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48년 8월 27일에는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 수녀들을 비현 본당에 초대하여 선교활동을 하게 했다. 1949년 5월 14일 평양 대목구장 홍 프란치스코 주교의 불법 납치를 시작으로 교구 내 성직자들의 수난이 본격화되었다. 김동철 마르코 신부는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수난의 때가 다가오리라 예측하고, 다른 신부들의 피랍 소식이 전해올 때마다 성체를 거두는 일을 거듭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목자는 자기 양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홍 프란치스코 주교의 당부를 되새기면서 본당에 단 한 명의 신자가 남아 있어도 자신은 교회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신자들에게 표명했다. 김동철 마르코 신부는 1950년 6월 27일 밤에 평양 대목구 내 성직자 중에서 가장 늦게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되던 날 저녁에 성당 종을 울려 신자들을 성당에 모으고는 짧은 이별 강론을 하였다. 그는 교우들을 향해 “부디 조용히 하시오. 모든 것이 천주의 섭리로 되는 것이니 소동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잡혀 갔다. 그 후 의주 형무소에서 삶은  옥수수 한 주먹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후의 행방은 불분명하나 피살되었음이 분명하다.

참고문헌: 천주교평양교구사(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1981년),북녘 땅의 순교자들: 평양교구 편(평양교구순교자자료수집위원회, 1999년)

분도 2011 가을호 26-27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5) – 노병조 안셀모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노병조 안셀모 신부

노병조 안셀모(Romer Anselm, 盧炳朝, 1885~1951) 신부는 1885년 12월 7일 독일 로텐부륵Rottenburg 교구 잉어킹엔Ingerkingen에서 태어나 요셉Josef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마친 후 1907년 10월 20일 첫 서원을 하였다. 1911년 5월 3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곧 바로 조선으로 선교 파견되어 같은해 12월 11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입국 후 언어공부를 시작하였으나 당시에는 교재가 없어서어려움이 많았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기존의 불한佛韓 문법책을 토대로 독한獨韓 문법책을 만들어 등사판으로 간행하였다. 1910년 서울 수도원은 솜씨 좋은 장인을 길러내어 선교 사업에 이바지 한다는 목적으로 공업계 직업학교인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설립하였다. 숭공학교 초대 교장은 옥락안 안드레아(Andreas Eckhardt, 玉樂安,1884-1974) 신부가 맡았고, 안셀모 신부가 뒤를 이었다.

1921년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tius Sauer, 辛上院,1877-1950) 주교 아빠스가 그를 원산 대목구 부감목副監牧(총대리)에 임명하였다. 원산 대목구 소속신학생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필요하여 숭공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고, 1921년 11월 3일에 소신학교가 문을 열었으며 안셀모 신부는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23년 서울 수도원 원장을 맡고 있던 김시련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 Schimid,金時練,  1883-1962) 신부가 수도원 이전을 준비하기 위하여 원산 본당 주임으로 발령 나자, 안셀모신부는 원장직까지 수행해야만 했다.원장으로재직하던 중 그는 1926년 3월에 간도間島에 있는본당들을 순방하였고, 훈춘琿春과 육도포六道泡본당에서 견진성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1926년12월 초부터 시작한 새 수도원과 신학교 건축공사가 마무리 되자, 1927년 11월 17일 서울 수도원 수사들과 신학생들이 덕원으로 옮겨 갔다. 수도원 옆에 지어진 새로운 신학교는 1927년 12월1일에 성 빌리브로드를 주보로 삼아 축복식을 거행하고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 안셀모 신부는 신학교만 전담하게 되었고, 부감목과 원장 직책은크리소스토모 신부가 맡았다. 1929년 8월 중순그는 6주 동안 일본을 방문하여 피정을 한 후 당시 일본 가톨릭의 중등학교를 둘러보고 한국인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그는 홍태화 루치오(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신부, 탁세영 파비아노(Fabian Damm, 卓世榮, 1900-1964) 신부와 함께 원산대목구 대표로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1931년에 개최된 전선주교회의全鮮主敎會議(지역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안셀모 신부는 북한 공산 당국에 의하여 덕원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하여 신학교 교장을 맡아 보면서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그는 신학생들의 학업, 영성, 건강 등을 꼼꼼하게 돌보았으나, 신학교 생활을 일일이 감독하지 않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할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그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의 쾌활한 웃음소리는 우울했던 학생들의 가슴을 활짝 열어주곤 했다. 그는 수도원에서성가대장으로 수십 년을 봉사했기 때문에 모든성가를 외우다시피 했지만, 매주 토요일마다 성가연습을 지도하면서“몰라서가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에서 연습시간을 갖는다.”라고 말했다고한다. 자신이 음악을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음악활동을 권장했다. 그때문에 여가 시간이 되면 신학교 전체가 악기 소리와 성가 소리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가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 덕원 신학교는 많은 발전을 보았다. 1929년 9월에 철학반이 개설되어 대신학교 교육과정이 시작되었다. 1933년 3월 17일에는 교지인『神友』신우가 창간되었다. 덕원 신학교는 그때까지 일제 당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설립인가를 받지 않은 채 운영되고 있었다. 1933년부터 조선 총독부는 인가 절차를 밟으라는 통보를 했고, 이를 위해 안셀모 신부는많은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1935년 2월 10일 공식적인 신학교 설립인가가 떨어졌고 5월 14일 성대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일제 당국으로부터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덕원 신학교는 태평양전쟁(1941-1945) 와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 중에 일제는 서울 용산 성심 신학교와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강제로 폐교시켰는데, 덕원 신학교는 두 신학교의 신학생들을 위탁하여 교육함으로써 끊길 뻔 했던 신학교육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6년 사제 서품 25주년을 맞은 안셀모 신부는 그 동안 쉬지 않고 활동한 탓에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기 위해 여름 방학동안 마닐라로 휴가를 다녀왔다. 1938년 9월 23일 화재로 신학교 건물이 전소되어 복구해야만했고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5월에는 신학교 건물이 일본군에게 징발당하여 노심초사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8·15 광복 후 북한 지역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1949년5월 9일에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홍태화 루치오 원장신부,  부원장 안세명 아르눌프(Arnulf Schleicher, 安世明,  1906-1952) 신부, 신학교 철학교수 길세동 루페르트(Rupert Klingseiz, 吉世東,1890-1950) 신부 등이 체포되자 그는 수도원의 임시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그 역시 5월 11일에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에 갇혀 있다가 자강도 전천군慈江道 前川郡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수용소의 노동과 굶주림 등으로날로 쇠약해진 노 안셀모 신부는 설사병과 수종水腫 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1951년 11월 9일 사망하여, 옥사덕 수용소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묻혔다.

자료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 교회사 연구소),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분도 2008년 겨울호 30-31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4) – 안세명 아르눌프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안세명 아르눌프 신부

안세명 아르눌프(Arnulf Schleicher, 安世明,1906-1952) 신부는 1906년 9월 21일 독일 로텐부륵Rotenburg 교구 플라움로크Pflaumloch에서태어나, 요셉Josef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에힝엔Ehingen에 있는 김나지움(Gynasium,독일의 인문계 중고등학교)을 졸업한 후 1925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926년 5월 15일 첫 서원을 한 후,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철학·신학 과정을 이수하였고, 신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였다. 1930년 7월 13일 딜링엔Dillingen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1932년4월 10일 조선으로 선교 파견되어 같은 해 7월 18일 덕원 수도원에 도착하였다. 내평內坪 본당(고산高山본당의 전신)주임 나국재 카누토(Canut Graf des Effans d’Avernas, 羅國宰, 1884-1950) 신부가 건강이 나빠져, 말을 배우던 아르눌프 신부가 그 해 12월 임시 보좌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5월 연피정이 끝나고 몇 주간 동안서울 대목구 내 본당에서 사목을 도우면서 말을익혔다. 그러다가 그 해 8월부터 약 1년간 원산元山 본당 주임 탁세영 파비아노(Fabian Damm, 卓世榮, 1900-1964) 신부가 일본에 체류하게 되자 임시 주임으로 사목하였다. 1934년 7월부터는 덕원 신학교에서 교의 신학과 성서 입문을 가르치면서 덕원 본당에서 고해성사와 강론 등을 하였으며, 이듬해에 신학교에서 성서 주석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천주교 간도 전래 4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1936년 8월 25일 용정 본당에서 ‘가톨릭교회와 현대사상’이라는 제목으로 기념강연을 하였다. 1937년 1월 24-31일에 개최된‘종교 주간’동안에는 원산 대목구 내의 본당 회장들과 교리교사들에게 호교론을 강의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28일 덕원 수도원에 도착한 7명의 독일인 성직지망 수사들의 양성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동양 언어에 능통했던 아르눌프 신부는 1938년에 50쪽 분량의『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라는교양서적을 저술하여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 1만 부를 간행하였다. 그의 가장 뛰어난 학문적 업적은 신약성경의 서간편과 묵시록을 우리말로 번역해낸 일이다. 성경의 우리말 번역 사업은 1935년에 열린 전선주교회의全鮮主敎會議의 결의에 따라 덕원 수도원에 일임되어 있었다. 아르눌프 신부는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로부터 성서 번역을 의뢰받고, 그 당시까지 번역되지 않았던 신약성경의 서간편과 요한 묵시록을 우선 번역하기로 하였다.성경 번역은 불가타(라틴어) 성경 원본을 참고하면서 그리스어 원문을 따랐다. 아르눌프 신부는 덕원 수도원 원장인 홍태화 루치오(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신부와 원산 대목구 소속 최병권 마티아(崔炳權, 1908-1949) 신부 그리고 평신도 김용학金龍學씨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번역작업을 진행하였다. 4년 동안의 각고의 노력 끝에 그가 번역해낸 신약성경의 서간편과 묵시록은 1941년 3월 25일『신약성서新約聖書 서간書簡·묵시편默示篇』이라는 제목으로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 아르눌프 신부 덕분에 조선 천주교회는 비로소 완전한 우리말 신약성경을 갖게 되었다.

1944년 12월 나벽재 레오폴드(Leopold Graf des Effans d’Avernas , 羅碧宰, 1887-1944) 부원장 신부가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부원장직을수행하면서 아르눌프 신부는 성직지망 수사들의양성을 맡았다.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성직지망 수사들과 평수사들의 양성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평수사들의 양성은 원장인 홍태화 루치오신부가 맡았다. 아르눌프 신부는 아주 작은 키에지성이 넘쳐 보이는 인상이었고, 성품이 온화하여 좀처럼 화내는 일이 없었으며, 대단히 친절하였다고 한다. 그는 수도원의 부원장, 신학교 교수, 성서 번역 그리고 광복 후에는 소련군과의교섭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수련자들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수련자들이 자율적으로 생활을 익히고정진하도록 배려했던 아르눌프 신부가 한 번은수련자들에게 “Fratres vos estis gaudium meumet corona mea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내 기쁨이며 면류관입니다. 필립 4,1) 라는 말을 했는데, 수련자들이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1949년 5월 9일 아르눌프 신부는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홍태화 루치오 원장신부,길세동 루페르트(Rupert Klingseiz, 吉世東, 1890-1950)신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었다. 같은 해8월 5일 독일인 선교사들이자강도慈江道 전천前川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이송되었으며, 이때 그는 평양 인민 교화소에 남게 된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로부터 모든 수도 가족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옥사덕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아르눌프 신부는 감시원들로부터 많은 욕설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같이 수용된 수도가족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성경과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내용을 들어 강론하였다. 1951년 겨울부터 숯 굽는 일을 하였지만, 이듬해 파종기播種期에 들어서면서 심장과 신장이 급격히 나빠져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또한 화농성 기관지염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고 있었다. 몸도 많이 붓고 발도 부어서 서지도 걷지도 못할 상태가 되자, 감시원들은 아르눌프 신부를 거름더미 위에 앉혀 거름을부수는 일을 시켰다.  결국 그는 기력을 완전히잃고 며칠 동안 앓다가 1952년 6월 28일 사망하여 옥사덕 수용소에 묻혔다.

자료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Necrologium(왜관 수도원)

분도 2008년 가을호 28-29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3) – 홍태화 루치오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겸 원산 대목구 부감목

홍태화 루치오 신부

홍태화 루치오 신부는 1890년 2월 19일 독일 바이에른 주 뷔르쯔부륵 교구 키르히도르프 바이흐퉁엔에서 태어나, 콘라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10년 10월 16일 첫 서원을 했다. 로마 성 안셀모 대학의 철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14년 7월 5일 로마 성 아뽈리나리우스 성당에서 바실리우스 폼피지 추기경으로부터 사제서픔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루치오 신부는 뮌헨주재 교황대사관에서 일했다. 이때 모셨던 교황대사가 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 대주교였는데, 이 분은 후일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12세가 되었다. 루치오 신부는 일생을 두고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1924년 8월 17일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으로 파견된 루치오 신부는 1925년 6월 육포도 본당의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5월에는 원산 본당의 13대 주임 신부로 임명되어 도시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1년 설립된 해성학교의 교장을 겸하여 학교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힘썼다. 1930년 6월 17일 덕원 수도원 원장을 맡고 있던 김시련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오틸리엔 수도원의 보좌 아빠스로 선출되자, 루치오 신부는 그의 뒤를 이어 8월 19일에 수도원 원장 겸 원산대목구 부감목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부터 원산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의 고해 신부를 맡았던 그는, 수도원 원장으로 있으면서도 매주 한 번씩 수녀원을 방문하여, 1934년 봄까지 성사를 집전하였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9월 13~27일 교황 사절에 의해 소집된 조선 공의회에 원산 대목구 대표로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와 임갈충 갈리스도 신부, 탁세영 파비아노 신부와 함께 루치오 신부도 참석하였다. 또 수도자들을 위하여 일주일에 네차례씩 영성 훈화를 하였으며, 소신학교에서는 독일어를,대신학교에서는 윤리 신학과 라틴어를 가르쳤다. 1935년 루치오 신부는 [평수사들을 위한 성무일도서]를 편찬하였다. 한편 1936년에는루치오 신부가 로마 미사 경본을 한글로 번역한 [미사경본]이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간행되었는데, 미사해설, 미사통상문 등이 수록된 한국 최초의 완전하고 체계적인 전례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이 간행됨으로써 신자들은 비로소 미사경문을 보며 전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600면 정도의 연습 분제가 포함된 [독한 문법책]을 편찬하여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 [가톨릭 청년]과 같은 잡지에 호교론과 공산주의 비판에 관한 논문들을 자주 발표하기도 하였다. 평소 많은 업무에 시달렸던 루치오 신부의 방은 깊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고, 바쁜 와중에도 종종 양호실에 가서 병든 형제들의 수발도 들어주었다고 한다. 1937년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서계성체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떠난 필리핀 여행은 루치오 신부에게 잠시나마 휴식의 시간이었고 그간의 노고를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8.15 광복 후 북한 지역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어려운 시기에 루치오 신부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공산당원들의 심문을 침착하게 견디어 냈다. 그리고 당신 목숨을 담보로 내놓으면서까지 교구와 수도원 그리고 수도형제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1949년 5월 19일에 루치오 신부는 사우어 주교, 수도원 부원장 안세명 아르눌프 신부, 덕원 신학교 교수 길세동 루페르트 신부 등과 함께 공산군에게 체포되었다. 성당을 포함한 수도원과 교구의 재산은 몰수 되었고 체포된 신부들은 원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평양인민 교화소로 이송되었다. 루치오 신부는 심한 고문과 형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 나갔다. 평양인민교화소에 갇혀 있는 동안 루치오 신부는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밖으로 연락을 취하였다. 그가 보내온 편지들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종잇 조각에 작성되었다. 루치오 신부가 보낸 마지막 편지는 자신이 공산정권으로부터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이었다. 루치오 신부는 결국 풀려나지 못한 채, 1950년 10월 3일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추측된다.

자료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분도 2008년 여름호 20-21 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2) –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덕원-함흥 교구, 1912년 생, 서울 이화동
세례명: 가브리엘
사제 서품: 1940년 3월 25일
소임:  덕원 신학교 사감, 회령 본당 및 계림 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원산 수녀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평양(추정)

 

구대준 가브리엘(具大浚, 1912-1950(?)) 신부는 1912년 4월 27일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구종진具鐘震 프란치스코는 한말 궁내부 주사로 관직에 있다가 한일합병 이후 순사 교습소의 한문 교관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순교자 가문 출신인 어머니 이정자李貞子 마리아를 배필로 맞아드리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삼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가브리엘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열네 살 되던 해 어의동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를 졸업하자 그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사제의 길을 걷고자 했다.그의 형 원준元浚이 일본에서 1923년 대지진으로 행방불명 된 후 라, 장남노릇을 해야 하는 그가 아직 어린애인 동생 상준常浚(시인 구상具常 세례자 요한, 1919-2004)만을 남기고 출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지가 굳을 뿐 아니라 부모도 성소의 막중함을 아는 지라 이를 허락했다. 그는 1926년 백동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운영하는 대목구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백동 수도원이 덕원으로 이전했고, 원산 대목구 소신학교도 같이 옮겨갔다. 마침 관직에서 물러난 아버지가 수도원에서 교육사업을 도와달라는 청을 받았다. 아버지는 아들 뒷바라지도 할 겸해서 가산을 정리해 온 가족과 더불어 덕원 수도원 아랫마을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수도원 인근의 문평, 옥평 등지에 해성학원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어 육영사업에 힘썼다.

그는 과묵하고 생각이 깊어 철학, 신학 과정에 모두 두각을 나타냈으며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문학에 뛰어났고 덕성이 깊어 동료들과 화목했다. 1940년 3월 25일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주교 아빠스의 주례로 이재철 베드로(李載喆, 1912-1950) 신부와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서품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덕원 신학교의 사감 신부로 임명되어, 신학생들에게 자율적이면서도 책임을 다하는 생활을 하도록 지도했다. 1942년에는 흥남 제2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당시 본당 신자들은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가난한 이주민들이었고, 대부분 질소비료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는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벗이 되어주었다. 노상 밤이 이슥하도록 본당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온종일 교우들에게 시달리면서도 강론준비를 철저히 해서 주일마다 교우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생활은 매우 엄격해서 식복사를 두지 않고 식사를 본당 회장댁에서 해결했는데, 수수와 좁쌀이 가득 섞인 험한 잡곡밥에 반찬도 그 집 식구와 언제나 똑같이 먹었다. 의복도 두 벌 이상 가지고 있지 않았고, 생활비도 교구에서 지급되는 한도에서 충당하고, 미사예물은 전부 자선활동에 사용했다. 그즈음 아버지가 중풍으로 4년간이나 병석에 있었다. 효성심이 깊었던 그는 주일마다 거르지 않고 친히 아버지께 성체를 모셔다 영해드렸을 뿐 아니라 변비가 잦은 아버지의 항문을 손가락으로 손수 후벼내 뒤를 보게 하는 정도였다. 어쩌다 과자나 과일 같은 선물이 들어오면 모아서 부모에게 가져다 드렸다.

그는 흥남에 수용되어 있던 연합군 포로들을 찾아가 성사를 집전할 정도로 용기가 있었다. 또한 일제의 사설학원 폐쇄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해성海星 학원을 계속 운영하였다. 1944년 봄에는 교우 김봉학의 도움으로 사제관에 대건 의원을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사제관을 병원으로 내놓고 조그만 목조건물로 본당 사무실과 처소를 옮겼다. 의사 서영옥 마리아 데레사가 의원을 맡았는데,그녀는 후일 동생 구상 시인의 부인이 되었다. 광복 후 점점 득세하는 공산당의 탄압으로 신앙이 약한 신자들이 하나 둘 교회를 멀리 하는 형편에서도, 그는 원산 수녀원에 수녀를 요청하여 1948년 5월 20일 원산 수녀원 흥남 분원을 설립했다.

회령 본당의 비트마르 파렌코프(Witmar Farrenkopf, 朴偉明, 1906-1945) 신부가 소련군에 피살되고 계림 본당의 프리돌린 짐머만(Fridolin Zimmermann, 閔德基, 1900-1946) 신부가 사망하자, 1949년 1월 25일 그는 두 본당의 교우들을 돌보기 위해 자원하여 부임해 갔다. 그가 그런 결심을 할 무렵 동생이 이를 만류하고 함께 월남을 권하자 “저 독일인 성직자들은 고국을 버리고 한국에 와서 이 고초를 겪는데, 내야 내 땅,내 교구, 내 본당, 내 교우들이 있는데 이를 버리고 가기는 어디를 가느냐?”고 잘라 말했다. 그는 1949년 5월 10일에 원산 수녀원에 한국 수녀들의 연례피정 지도를 하러 갔다. 피정을 시작한 그날 밤 그는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그 다음날 평양 인민교화소에 이송 수감되었다. 그는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와 함께 격리된 작은 감방에 있었다. 1949년 8월 5일경 그는 무척 쇠약한 상태에 있었던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에게 병자성사를 거행했다. 이후의 행방은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던 호노라도 밀레만(Honorat Millemann, 南道光, 1903-1988) 신부는 “평양 형무소에서 같이 있었는데 언제나 근엄하고 맘과 얼굴에 기쁨의 미소와 평화를 잃지 않고 아주 평화스러운 사제로 끝까지 살다가 어느 날 어디론지 끌려가서 그 후 다시 만나지 못했어요.”라고 술회했다.

자료출처 具 가브리엘 大浚 신부(분도출판사, 1984년), Schematismus(오딜리아 연합회), 북한에서의 시련(분도출판사, 1997년)

분도 2011년 봄호 26-27페이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 –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시복시성 대상자인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약전을 소개하고 시복 추진 현황을 알려드립니다.

 

서울.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설립자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1877년 독일 폴다 교구 오베루프하우젠에서 태어났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00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03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08년 도미니코 엔쇼프 신부와 함께 한국 진출 책임자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파견된 후 서울 백동 수도원을 세웠다. 1913년 아빠스로 임명되었고, 1920년에는 신설된 원산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주교로 성성되었다. 1927년 수도원을 덕원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추진하여 1949년 덕원 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본당 사목, 교육사업, 출판사업, 의료봉사 등을 펼치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성덕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덕원 수도원을 선교활동과 수도생활이 완벽히 조화된 이상적인 모델로 만들었다.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체포된 후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되어 1950년에 옥사하였다.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1877-1950)는 1877년 1월 10일에 독일 헤센주 풀다 교구 북부의 오베루프하우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풀다의 김나지움에서 중등 교육 과정을 마쳤으나 부친의 건강 악화로 더 이상 학업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로 유학을 떠난 그는 그곳에서 선교에 대한 열망과 주위의 권유로 22세 때인 1899년 2월 초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약 1년동안의 수련기를 거쳐 1900년 2월 4일 수도 서원을 하였으며, 그 해 가을 베스트팔렌 주의 뮌스터에서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을 통과한 후 3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였다. 1903년 7월 26일 딜링겐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그곳에 있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부속 성 보니파시오 기숙사의 사감으로 임명된 그는, 학생들의 생활과 영성 지도 신부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한국에서 교육사업을 전개 할 수도회를 찾기 위해 유럽을 순방 중이던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가1908년 9월 15일 수도원을 방문하여 선교사 파견을 청하자 이를 수락하고 한국 진출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신부는 도미니코 엔쇼프 신부와 함께 한국 진출 책임자로 임명되어 이듬해 1월 11일 독일 떠나 일본을 거쳐 2월 2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곧바로 수도원 부지를 물색하던 그들은 그 해 7월말 뮈텔 주교의 도움으로 동소문 부근의 백동 낙산 아래 에 위치한 약 3만평의 대지를 매입하였다. 그런 다음 보니파시오 신부는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 따라 사는 수도 생활을 소개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선교라고 생각하고 수도원 건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같은 해 12월 6일 임시 수도원 건물이 완공된 데 이어 1910년1월 8일에는 서울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원장좌 자립 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보니파시오 원장은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목적이 교육사업에 있음을 감안하여 1910년에 실업 교육을 위한 4년제 숭곡학교를 설립하였고, 이듬해에는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담당할 교원을 양성할 목적으로 2년제 사범학교인 숭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 계속해서 몇 명의 선교사가 더 파견되어 수도원의 규모가 커지자 1913년 5월 5일에는 서울 수도원이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고, 보니파시오 원장은 그 해 6월 8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성당에서 아빠스로 축복되었다.

 보니파시오 아빠스는 일본 제국이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후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변함에 따라 서울 수도원의 활동 영역이 급격히 축소되고, 일제의 탄압 정책으로 교육 환경이 악화되면서 선교사들이 점차 본당 사목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그는 1914년에 베버 총아빠스에게 전교 지역이 필요하다는 의견서를 제출하고 뮈텔 주교와도 이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 결과 베네딕도회는 1920년 8월 5일 교황청으로부터 새로 설정된 원산 대목구의 사목권을 위임받게 되었으며, 보니파시오 아빠스는 그 해 8월 25일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일 서울 대목구 보좌 주교로 임명된 드브레 주교와 함께 주교로 성성되었다.

 이에 베네딕도회에서는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함경도 지역의 원산 본당과 내평 본당을 비롯하여 간도 지방의 삼원동 본당, 팔도구 본당, 용정 본당 등 5개 본당의 사목권을 인수 받았다.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임시로 원산 본당과 서울 수도원을 맡아 교구장으로서의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선교 지역과 수도원 본원의 거리상 문제와 기타 다른 몇 가지 이유들로 인해 수도원과 신학교를 원산 인근의 덕원으로 이전 하기로 결정하였다. 즉시 수도원 증축 공사에 착수하여 1927년 덕원 수도원을 완공한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1928년에는 연길 지목구를 분할 독립시켰으며, 함경도 지역의 교세 확장에 주력하여 신고산, 덕원, 고원,영흥, 함흥, 흥남, 북청, 웅기, 나남, 성진, 청진, 회령 등에 본당을 신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본당에 해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특히 수도원 내에 있던 덕원 신학교의 운영과 발전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수도원을 비롯한 여러 본당에 병원을 세워 의료 사업을 전개하였고, 신학교 내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교리문답], [미사경본], [가톨릭 성가] 등 각종 교회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또한 1925년 11월에는 본당 사목과 특수 사목을 보다 원활히 추지하기 위하여 독일 툿찡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를 초청하였으며 아울러 원산 대목구의 교세가 계속 성장하자 중국 간도성 연길 지역과 흑룡강성 의란 지역의 정치적 위치를 고려하여 이 지역이 독립을 교황청에 건의 하였다. 그 결과 1928년 7월 3일자로 의란 지역이 독립 포교지로 설정됨과 동시에 임시로 신 보니파시오 주교 관할 아래 있게 되었다. 또 같은 해 7월 19일에는 연길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간도 지역의 사목권이 새 교구장으로 임명된 백테오도로 신부에게 이관되었다.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덕원으로 이전한 후 “십자가와 규칙으로”라는 모토로 활발한 대내외적인 활동을 통해 교구 정착과 발전을 모색하였다. 그는 1931년에 개최된 ‘조선 대목구 설정 한국 천주교회 공의회’와1933년에 개최된 ‘한국 5교구 주교회의’에 참석 하였으며, 1928년 1월부터 1929년 2월까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총아빠스 노르베르트 베버의 은경축 행사 참석차 독일을 방문한 데 이어, 1933년 11월1부터 1935년4월까지 오딜리아 연합회 총회 참석차 다시 독일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광대한 함경도 전역을 자주 순방하면서 성무를 집행하였고, 재정 궁핍 속에서도 본당 신설과 학교 건립을 꾸준히 추진하여 교세 확장에 기여했다. 그 후 1940년 1월 12일 원산 대목구가 ‘덕원 면속구’와 ‘함흥 대목구’ 로 분리된 후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다시 덕원 면속구장 겸 함흥 대목구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5월 13일 수도원 성당 내에서 덕원 면속구 설정식과 함께 착좌식이 거행됨으로써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교회법적으로 면속구의 정식 초대 교구장이 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태평야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수도생활과 사목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다.

 8.15 광복 후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공산당이 종교 탄압의 일환으로  시행한 ‘토지개혁령’으로 인해1946년 수도원의 토지를 모두 몰수당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949년 5월 9일 밤에 수도원장 로트 신부, 부원장 슐라이허 신부, 신학교 교수 클링사이즈 신부 등과 함께 북한 공산당에 의해 체포되어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되었다. 이후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72세의 노구로 지병인 천식이 악화된데다가 영양실조까지 겹쳐 1950년 2월 7일 옥사 하였다. 얼마 후 베네딕도회 소속 수사들과 수녀들에 의해 시신이 발굴되어 평양 인민교화소 옆에 묻혔다.

출처 한국 가톨릭 대백과사전(교회사 연구소), Necrologium(왜관수도원)

 분도 창간호 2008년 봄 20-23쪽

신 보니파시오와 김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 38위 시복 시성 기도문

신 보니파시오와 김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 38위 시복 시성 기도문

 

성자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부르시어
복음과 성 베네딕도의 정신으로 이 겨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성령의 은사로 그들을 굳건하게 하시어
죽기까지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게 하셨나이다.

◎  인자하신 주님,
북녘 땅에서 굳은 신앙으로 당신 영광을 드러낸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에게 시복 시성의 영예를 허락하시어
하느님 나라를 위한 그들의 헌신이 널리 현양되게 하소서.
저희도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본받아
고난과 역경을 견디어 냄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증거하고
마침내 하늘나라의 영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한국 교회의  주보이신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사부 성 베네딕도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한국의 모든 성인 성녀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2010년 3월 21일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 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