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9) – 노병조 안셀모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노병조 안셀모 신부

 

노병조 안셀모(Romer Anselm, 盧炳朝, 1885~1951) 신부는 1885년 12월 7일 독일 로텐부륵Rottenburg 교구 잉어킹엔Ingerkingen에서 태어나 요셉Josef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마친 후 1907년 10월 20일 첫 서원을 하였다. 1911년 5월 3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곧 바로 조선으로 선교 파견되어 같은해 12월 11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입국 후 언어공부를 시작하였으나 당시에는 교재가 없어서어려움이 많았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기존의 불한佛韓 문법책을 토대로 독한獨韓 문법책을 만들어 등사판으로 간행하였다. 1910년 서울 수도원은 솜씨 좋은 장인을 길러내어 선교 사업에 이바지 한다는 목적으로 공업계 직업학교인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설립하였다. 숭공학교 초대 교장은 옥락안 안드레아(Andreas Eckhardt, 玉樂安,1884-1974) 신부가 맡았고, 안셀모 신부가 뒤를 이었다.

1921년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tius Sauer, 辛上院,1877-1950) 주교 아빠스가 그를 원산 대목구 부감목副監牧(총대리)에 임명하였다. 원산 대목구 소속신학생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필요하여 숭공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고, 1921년 11월 3일에 소신학교가 문을 열었으며 안셀모 신부는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23년 서울 수도원 원장을 맡고 있던 김시련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 Schimid,金時練,  1883-1962) 신부가 수도원 이전을 준비하기 위하여 원산 본당 주임으로 발령 나자, 안셀모신부는 원장직까지 수행해야만 했다. 원장으로재직하던 중 그는 1926년 3월에 간도間島에 있는본당들을 순방하였고, 훈춘琿春과 육도포六道泡 본당에서 견진성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1926년12월 초부터 시작한 새 수도원과 신학교 건축공사가 마무리 되자, 1927년 11월 17일 서울 수도원 수사들과 신학생들이 덕원으로 옮겨 갔다. 수도원 옆에 지어진 새로운 신학교는 1927년 12월1일에 성 빌리브로드를 주보로 삼아 축복식을 거행하고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 안셀모 신부는 신학교만 전담하게 되었고, 부감목과 원장 직책은크리소스토모 신부가 맡았다. 1929년 8월 중순그는6주 동안 일본을 방문하여 피정을 한 후 당시 일본 가톨릭의 중등학교를 둘러보고 한국인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그는 홍태화 루치오(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신부, 탁세영 파비아노(Fabian Damm, 卓世榮, 1900-1964) 신부와 함께 원산대목구 대표로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1931년에 개최된 전선주교회의全鮮主敎會議(지역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안셀모 신부는 북한 공산 당국에 의하여 덕원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하여 신학교 교장을 맡아 보면서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그는 신학생들의 학업, 영성, 건강 등을 꼼꼼하게 돌보았으나, 신학교 생활을 일일이 감독하지 않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할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그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의 쾌활한 웃음소리는 우울했던 학생들의 가슴을 활짝 열어주곤 했다. 그는 수도원에서성가대장으로 수십 년을 봉사했기 때문에 모든성가를 외우다시피 했지만, 매주 토요일마다 성가연습을 지도하면서“몰라서가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에서 연습시간을 갖는다.”라고 말했다고한다. 자신이 음악을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음악활동을 권장했다. 그때문에 여가 시간이 되면 신학교 전체가 악기 소리와 성가 소리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가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 덕원 신학교는 많은 발전을 보았다. 1929년 9월에 철학반이 개설되어 대신학교 교육과정이 시작되었다. 1933년 3월 17일에는 교지인『神友』신우가 창간되었다. 덕원 신학교는 그때까지 일제 당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설립인가를 받지 않은 채 운영되고 있었다. 1933년부터 조선 총독부는 인가 절차를 밟으라는 통보를 했고, 이를 위해 안셀모 신부는많은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1935년 2월 10일 공식적인 신학교 설립인가가 떨어졌고 5월 14일 성대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일제 당국으로부터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덕원 신학교는 태평양전쟁(1941-1945) 와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 중에 일제는 서울 용산 성심 신학교와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강제로 폐교시켰는데, 덕원 신학교는 두 신학교의 신학생들을 위탁하여 교육함으로써 끊길 뻔 했던 신학교육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6년 사제 서품 25주년을 맞은 안셀모 신부는 그 동안 쉬지 않고 활동한 탓에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기 위해 여름 방학동안 마닐라로 휴가를 다녀왔다. 1938년 9월 23일 화재로 신학교 건물이 전소되어 복구해야만했고 태평양전쟁 막바지인1945년 5월에는 신학교 건물이 일본군에게 징발당하여 노심초사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8·15 광복 후 북한 지역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1949년5월 9일에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홍태화 루치오 원장신부,  부원장 안세명 아르눌프(Arnulf Schleicher, 安世明,  1906-1952) 신부, 신학교 철학교수 길세동 루페르트(Rupert Klingseiz, 吉世東,1890-1950) 신부 등이 체포되자 그는 수도원의 임시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그 역시 5월 11일에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에 갇혀 있다가 자강도 전천군慈江道 前川郡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수용소의 노동과 굶주림 등으로날로 쇠약해진 노 안셀모 신부는 설사병과 수종水腫 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1951년 11월 9일 사망하여, 옥사덕 수용소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묻혔다.

자료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 교회사 연구소),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분도 2008년 겨울호 30-3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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