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3) – 홍태화 루치오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겸 원산 대목구 부감목

홍태화 루치오 신부

홍태화 루치오 신부는 1890년 2월 19일 독일 바이에른 주 뷔르쯔부륵 교구 키르히도르프 바이흐퉁엔에서 태어나, 콘라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10년 10월 16일 첫 서원을 했다. 로마 성 안셀모 대학의 철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14년 7월 5일 로마 성 아뽈리나리우스 성당에서 바실리우스 폼피지 추기경으로부터 사제서픔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루치오 신부는 뮌헨주재 교황대사관에서 일했다. 이때 모셨던 교황대사가 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 대주교였는데, 이 분은 후일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12세가 되었다. 루치오 신부는 일생을 두고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1924년 8월 17일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으로 파견된 루치오 신부는 1925년 6월 육포도 본당의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5월에는 원산 본당의 13대 주임 신부로 임명되어 도시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1년 설립된 해성학교의 교장을 겸하여 학교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힘썼다. 1930년 6월 17일 덕원 수도원 원장을 맡고 있던 김시련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오틸리엔 수도원의 보좌 아빠스로 선출되자, 루치오 신부는 그의 뒤를 이어 8월 19일에 수도원 원장 겸 원산대목구 부감목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부터 원산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의 고해 신부를 맡았던 그는, 수도원 원장으로 있으면서도 매주 한 번씩 수녀원을 방문하여, 1934년 봄까지 성사를 집전하였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9월 13~27일 교황 사절에 의해 소집된 조선 공의회에 원산 대목구 대표로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와 임갈충 갈리스도 신부, 탁세영 파비아노 신부와 함께 루치오 신부도 참석하였다. 또 수도자들을 위하여 일주일에 네차례씩 영성 훈화를 하였으며, 소신학교에서는 독일어를,대신학교에서는 윤리 신학과 라틴어를 가르쳤다. 1935년 루치오 신부는 [평수사들을 위한 성무일도서]를 편찬하였다. 한편 1936년에는루치오 신부가 로마 미사 경본을 한글로 번역한 [미사경본]이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간행되었는데, 미사해설, 미사통상문 등이 수록된 한국 최초의 완전하고 체계적인 전례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이 간행됨으로써 신자들은 비로소 미사경문을 보며 전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600면 정도의 연습 분제가 포함된 [독한 문법책]을 편찬하여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 [가톨릭 청년]과 같은 잡지에 호교론과 공산주의 비판에 관한 논문들을 자주 발표하기도 하였다. 평소 많은 업무에 시달렸던 루치오 신부의 방은 깊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고, 바쁜 와중에도 종종 양호실에 가서 병든 형제들의 수발도 들어주었다고 한다. 1937년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서계성체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떠난 필리핀 여행은 루치오 신부에게 잠시나마 휴식의 시간이었고 그간의 노고를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8.15 광복 후 북한 지역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어려운 시기에 루치오 신부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공산당원들의 심문을 침착하게 견디어 냈다. 그리고 당신 목숨을 담보로 내놓으면서까지 교구와 수도원 그리고 수도형제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1949년 5월 19일에 루치오 신부는 사우어 주교, 수도원 부원장 안세명 아르눌프 신부, 덕원 신학교 교수 길세동 루페르트 신부 등과 함께 공산군에게 체포되었다. 성당을 포함한 수도원과 교구의 재산은 몰수 되었고 체포된 신부들은 원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평양인민 교화소로 이송되었다. 루치오 신부는 심한 고문과 형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 나갔다. 평양인민교화소에 갇혀 있는 동안 루치오 신부는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밖으로 연락을 취하였다. 그가 보내온 편지들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종잇 조각에 작성되었다. 루치오 신부가 보낸 마지막 편지는 자신이 공산정권으로부터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이었다. 루치오 신부는 결국 풀려나지 못한 채, 1950년 10월 3일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추측된다.

자료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분도 2008년 여름호 20-2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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