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대상자 약전 (16) – 허희학 힐라리오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허희락 힐라리오 수사
덕원 수도원, 1888년 6월 27일 생, 독일 뮌헨-프라이징 대교구 출신
세례명: 베네딕도
첫서원: 1910년 8월 15일
한국 파견: 1911년 1월 7일
소임: 숭공학교 교사, 수도원 건축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2월 12일, 만포 관문리 수용소
허희락 힐라리오(Hilarius hoiß, 許喜樂, 1888-1950)수사는 1888년 6월 27일 독일 뮌헨-프라이징München-Freising 대교구 슐레도르프Schlehdorf 본당 관할인 운테라우Unterau에서 아버지 안드레아스 호이스와 어머니 마리아 호이스 사이에서 태어나 베네딕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운터파이쎈부르크Unterpeißenberg에서 마차 수리 기술을 배웠다. 수도생활을 하려는 뜻을 품고 본당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추천서를 받았다. “규정에 따라 축일과 의무축일에 자주 성체를 영했으며, 기쁜 마음으로 정비소에서 일을 했고 필요할 때에는 농사일도 했다.” 1909년 8월 15일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힐라리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10년 8월15일 첫서원을 발하고, 그 이듬해 1월7일 한국으로 선교 파견되었다. 그는 서울 백동 수도원을 시찰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 그리고 한국으로 선교 파견된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1911년 2월 21일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서울 백동 수도원은 숭공학교를 세워 한국 젊은이들에게 전문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에 이미 마차 제작 및 수리 전문 기술자(Geselle) 자격을 갖춘 힐라리오 수사는 한국에 오자마자 숭공학교 학생들에게 철공기술을 가르쳤다. 그가 맡은 제차부製車部 에서는 일반인들의 자동차 상부를 제작하고 수선하는 일도 했는데 평판이 좋았다. 1913년 11월 1일 종신서원을 발했다. 간호원 자격까지 갖춘 그는 수도원 양호실을 담당하기도 했을 만큼 유능한 일꾼이었다.
그의 재능은 1920년 8월 5일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사목관할이 서울 백동 수도원에 위임되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원산 본당을 시작으로 해서 인수받은 본당 건물들을 수리했다. 낡을 대로 낡은 건물들은 그의 손길로 다시 생기를 찾았다. 그는 1922년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가 북간도로 사목방문을 떠나면서 대동하고 갈 정도로 신임을 얻고 있었다. 1925년 가을에는 팔도구 본당 종탑 수리공사를 했다. 1928년 7월 19일 연길 지목구가 설정되고 선교지가 어느 정도 정비되자 그는 덕원 수도원으로 돌아갔으나, 그후에도 여기저기 쉴 새 없이 불려 다녔다. 1929년 9월 중순 함흥으로 가서 임시본당으로 쓸 집을 지어주었고, 11월에는 덕원 본당 관할 공소에 경당과 교리실을 지어주었다. 1930년에는 대령동 본당 성당과 사제관 신축공사를 맡았다. 이때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마적들의 습격에 대비하여 손에 칼을 들고 망을 보면서 본당을 지켰다. 그런 다음 1931년에는 합마당 본당으로 가서 성당 신축공사를 감독했다. 1933년 삼원봉 본당이 화룡으로 옮겨갈 때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건축일 뿐 아니라 제빵용 오븐을 설치하거나 비틀어진 성당 문을 바로잡는 일은 물론 예절지기로서 복사들을 지휘하는 일 같은 사소한 것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형제들이 많았다. 서원 은경축을 지냈던 1935년에도 흥남 본당 신축을 위한 기초공사를 맡았다. 약초에 대하여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그는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지시로 한국의 약초를 깊이 연구했다.
1949년 봄, 힐라리오 수사는 덕원 수도원이 공산정권에 의해 폐쇄될 조짐을 미리 발견했다. 그는 어느 날 인쇄소 일꾼 하나가 종이를 가득 담은 자루를 질질 끌고 산으로 가는 것을 보고 인쇄소 책임자인 루도비코 피셔(Ludwig Fischer, 裵, 1902-1950) 수사에게 알렸다. 하지만 루도비코 수사는 별 반응이 없었다. 3월 중순 인쇄소 일꾼 둘이 잡혀갔다. 반공 삐라를 인쇄했다는 죄목이었다. 4월 중순 루도비코 수사까지 체포되자 덕원의 종말은 시간 문제였다. 결국 5월 11일 이른 새벽, 그는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수도원에 들이닥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어 수감되었다가,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는 쇠약해져서 앉아서 겨우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약초지식을 디오메데스 수녀에게 전수하여 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구했다. 그는 거칠고 억센 큰 손으로 온갖 종류의 아름답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 내었다. 그가 만든 수용소 경당의 감실과 미사 때 쓰는 나무 촛대는 그의 깊은 신심을 보여주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담배 파이프와 귀향길에 쓸 산책용 지팡이를 만들었다. 1950년 전쟁을 일으켜 초반에 승기를 잡던 북한군이 연합군의 공세에 밀리게 되자 그와 동료들은 이른바 ‘죽음의행진’을 겪어야만 했다. 죽음의 행진은 10월 25일 만포 교화소에 이르렀다가 국경을 넘어 10월 27일 만주로, 다시 만포 교화소를 거처 관문리 수용소로 이어졌다. 관문리 수용소에서 그는 추위로 완전히 기력을 소진했다. 1950년 12월 12일 그는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한국인 포로들이 그의 시신을 밖으로 운반해 나가 매장했으며, 수도형제들이 그 장소를 확인했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
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분도 2011년 겨울호 28-2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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