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ef history of 100 years of St. Paul’s Abbey -(K)

소화 데레사 수도원 – 성 바오로 수도원

성 바오로 수도원은 베네딕도회로서 19세기 교회에서 새롭게 일어난 선교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 수도원이다. 독일 보이론 수도원 수도사였던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는 유럽에서 1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선교 전통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었고, 1884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선교 베네딕도 수도원을 설립했다. 설립 후 로마는 즉시 이 새로운 수도회에 현재의 탄자니아 남부 지역을 그들의 선교 구역으로 배정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은 동아프리카에서의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에 차질을 빚게 하였으며, 1917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든 독일 수도자들이 구금되었고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 수도자들은 선교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독일을 넘어 인력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전후 독일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서 성 오틸리엔 수도회는 미국으로 눈을 돌려 1921년 그전에 동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미카엘 하인라인 신부 (Fr. Michael Heinlein)를 미국으로 파견하여 선교 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고 수도원 설립지를 물색하게 하였다. 미카엘 신부는 몇 년간 미국 전역을 둘러본 후, 동부가 수도원 설립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923년 말, 뉴저지 주 뉴왁 교구에 속한 뉴튼의 성 요셉 성당과 연락이 닿았고, 미카엘 신부는 마이클 도넬리 신부의 도움으로 현재의 뉴튼 수도원 앞을 지나는 206번 도로에 있는 레드 게이트 (Red Gate) 농장을 찾게 되었다. 이 농장은 약 500에이커의 면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1849년경 지어진 석조와 목조 주택 및 여러 부속 건물에 20에이커 규모의 호수와 농가 그리고 헛간이 있었다. 1924년 1월, 뉴왁 교구장의 수도원 설립에 대한 동의하에 3월 초에 이 토지를 매입하고 3월 15일, 미카엘 신부와 마티아스 네트 신부가 레드 게이트 농장을 인수함으로써 뉴튼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4월 21일, 동아프리카 선교 수도자들의 전 장상이었던 토마스 스프레이터 주교 (Bishop Thomas Spreiter)가 첫 미사를 집전했으며, 수도 공동체는 그 당시 복자였던 리지웨의 데레사를 수호성인으로 모심으로 그때부터 소화 데레사 수도원 (Little Flower Monastery)으로 불리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독일의 여러 수도원에서 온 여섯 명의 형제가 뉴튼에 도착했으며, 1925년 3월까지 워싱턴 주에 세우려던 수도원의 일부 수도사들 또한 뉴튼으로 옮겨오면서 공동체의 규모가 두 배로 늘게 되었다. 이전 농지는 다시 활성화되어 젖소를 기르고 우유를 판매하게 되었으며, 호수 근처에는 사과 과수원이 조성되었고, 경작되지 않은 땅에는 나무가 심어졌으며, 이 프로젝트는 후에 수도원의 크리스마스트리 농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 수도원이 폐쇄될 위기에 처했으나, 오틸리엔 수도원에 새로 선출된 크리소스토무스 슈미드 총 아빠스 (Archabbot Chrysostom Schmid)가 1931년 수도원을 방문한 후 공동체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미카엘 신부는 수도자들뿐 아니라 그가 꿈꾸던 베네딕도회 선교 신학교를 위해 더 큰 건물을 계획하였으며 1932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당시 신학교에는 15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1934년에는 이 신학교의 졸업생 중 한 명이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이듬해 첫 미국인 성소자인 보니파스 크로닌 신부(Fr. Boniface Cronin)가 서원을 하였다. 1936년 수도원은 교황청에 의해 자치 수도원으로 격상되었으며, 창립자인 미카엘 신부는 자치 수도원의 첫 수도원장으로 계속해서 봉사하게 되었다. 그는 성소에 힘을 쏟았으며, 1938년에는 청소년 캠프인 성 베네딕토 캠프가 시작되었는데, 전쟁 기간 동안 일시 중단되었지만 1978년까지 운영되었다. 이 캠프는 수년간 수도원에 여러 성소자를 배출했으며, 그중 두 명은 아빠스가 되었다. 캠프는 1970년대 초에 정점에 이르렀으나, 1978년에는 캠핑의 성격이 변하고 수도자의 부족 및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폐쇄되었다.

공동체의 급속한 성장과 미국인 성소자들의 입회 그리고 대공황과 관련된 재정적 어려움은 미카엘 신부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안겨주어 1941년 7월 원장에서 사임하였는데, 그의 지도력 아래 당시 공동체는 9명의 사제, 15명의 서원 수도자들 그리고 6명의 수련자들이 있었다. 미카엘 신부를 이어 독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출신의 아퀼린 센델바흐 신부 (Fr. Aquilin Sendelbach)가 1941년 7월 관리 원장에 임명되었는데,  아퀼린 신부는 전쟁 시기 동안 공동체를 이끌며 경제적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동체 성장의 성과 중 하나는 1945년에 두 명의 미국인이 선교지로 파견된 것이었는데, 앤드류 오설리번 신부와 폴 키오한 신부(Fr. Andrew O’Sullivan and Fr. Paul Keohane)는 남아프리카의 줄루랜드 선교지로 파견되었다는 것이었다. 1947년 6월 9일, 수도원이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해 8월, 미국인 찰스 코리스톤 신부(Fr. Charles Coriston)가 초대 아빠스로 선출되었음과 동시에 수도원을 선교 사도인 성 바오로의 수호 아래 두는 것이 허락되었다. 수도원은 계속해서 성장함에 따라 1932년에 지어진 수도원 건물은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을 수용하기에 너무 작아 1948년에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임시 건물을 세우기도 하였다. 성소자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독일 수도자들 중 일부는 아프리카로 간 젊은 미국 형제들과 합류하여 남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갔으며, 형제들 중 일부는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1960년에는 새로운 수도원 건물 계획이 수립되어, 1962년 11월에 공동체는 206도로 건너 현재 수도원 건물을 새로 지어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전 수도원 건물은 2000년까지 피정의 집으로 운영되었다.

1960년대는 가톨릭 교회에 있어 매우 특별한 시기였는데,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면서 더욱 그러하였다. 미국에서도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민주화 운동과 평화 운동은 사람들의 사고에 도전을 주었고 이러한 경향과 경험은 나라의 삶뿐만 아니라 성 바오로 수도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공동체의 일부 구성원들은 평화, 정의, 사회적 인식에 대한 관심으로 이러한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 시기에 여러 구성원들이 새로운 사도직과 성소를 찾아 공동체를 떠나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공동체를 19년간 이끌었던 찰스 아빠스에 이어 1966년 12월에 어거스틴 힌치스 신부(Fr. Augustine Hinches)가 관리 원장으로 임명되었는데, 1970년 9월에 성 바오로 수도원의 두 번째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그는 새로운 신학교 건물의 완공을 감독했으나, 시대의 변화로 인해 70년대 초에 신학교가 결국 폐쇄되었다. 크리스마스트리 농장과 피정집 운영을 크게 확장하여 수도원의 재정적 안정을 가져왔으나 성소 손실을 회복할 수는 없었고, 수도원에 새로 입회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1982년 3월, 어거스틴 아빠스의 뒤를 이어 수도원의 세 번째 아빠스로 저스틴 지코위츠 신부(Fr. Justin Dzikowicz)가 선출되었다. 그의 지도 아래 공동체는 자기 성찰과 미래에 대한 질문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아프리카에 있는 연합회 소속 수도원들에서 온 수도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도원에서 미국 생활에 대한 오리엔테이션과 언어 교육과 함께 미국의 베네딕도회 대학에서 공부하는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도 선교 헌신은 여전히 강해서 남아프리카 잉카나마 수도원과 케냐에 있는 수도원에 선교 파견을 가기도 하였다. 1996년 12월 31일에 저스틴 아빠스가 사임을 함에 따라 1997년 1월에 공동체는 5년 동안 케냐 나이로비와 티고니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조엘 마쿨 신부(Fr. Joel Macul)를 네 번째 아빠스로 선출했다. 그의 선출 당시 수도원에는 연로한 열 명의 수도자들이 살고 있었기에 미래에 대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으나,  먼저 1999년 10월 2일에 창립 7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2000년 희년에 공동체는 기도하고 미래를 결정하게 되었는데, 오랜 논의 끝에 공동체는 뉴튼에서 수도원 공동체를 단계적으로 해체하는 과정을 시작하기로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0년 10월 오틸리엔 연합회 총회는 뉴튼 공동체의 청원을 받아들였으며 수도사들은 새로운 수도원을 찾기 시작했다. 한편, 2001년 1월 오틸리엔 연합회의 총재 아빠스로 선출된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Archabbot Jeremias Schroeder )의 방문은 수도원의 수도 생활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었는데, 그는 한국 왜관 수도원에 뉴튼 수도원을 인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2001년 8월 왜관 수도원의 장상으로 선출된 이 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는 그해 9월 중순에 뉴튼을 방문하여 이 지역에서 사목하고 있던 한인 성직자들과 신자들을 만난 다음 왜관에 돌아가 수도원 회의에 정식으로 뉴튼 수도원 인수를 제안하였다. 그 당시 시몬 아빠스는 뉴튼 수도원과 왜관 수도원의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는데, 6.25 전쟁 때 흥남 철수 작전에서 선장으로 만 사천 명의 피난민을 구하였던 마리누스 라루 수사, 왜관 수도원의 뿌리였던 이북 덕원 수도원 시절 경제적인 도움을 청하기 위한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몇 차례에 걸친 뉴튼 수도원 방문 그리고 한국 전쟁 후 왜관 수도원 설립을 준비하고 초대 원장을 역임하였던 디모테오 비테를리 신부가 뉴튼 수도원에 머무르며 설립을 준비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인연과 함께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이민자들과 신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판단으로 왜관 수도 공동체는 시몬 아빠스의 제안에 동의하게 되며, 2001년 12월 13일 오딜리아 연합회의 주보 축일인 성녀 오딜리아 대축일에 전 공동체가 모인 가운데 김 구인 보스코 신부와 5명의 수도자들이 선교 파견을 받고 12월 15일 뉴튼 수도원에 도착하였다. 마침내 2002년 1월 25일 성 바오로 축일에 미국 수도자들은 공식적으로 수도원의 소유권과 관리를 왜관 수도원의 형제들에게 넘기게 됨으로 뉴튼 수도원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이 시작된 것이었다. 왜관 수도원의 정식 분원으로 공표된 지 2년 후인 2004년 1월 25일에는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승격되게 되었고, 김 요한 보스코 신부가 원장으로, 김 사무엘 신부가 부원장으로 임명되어 뉴튼 수도원이 다시 한번 이 지역에 베네딕도회가 성장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2007년 1월 25일에 김 보스코 신부가 사임을 하고 김 사무엘 신부가 원장으로 임명되어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여러 명의 성소자가 수도원에 입회하였으며 그들 중에 종신 서원을 한 형제들도 3명이 되며, 헌신자(Monk oblate)도 한 명이 있었다. 2024년 현재 미국인 수도자 2명, 탄자니아 수도자 1명 그리고 한인 수도자 6명 모두 9명이 생활하고 있다. 뉴튼 수도원은 약 430에이커(52만평) 부지에 수도자들이 사는 수도원 건물과 피정집, 채소밭, 성물방 그리고 크리스마스 트리 농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 이상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1년 한인 수도자들이 온 후에 피정집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옛 피정집은 너무 낡고 보수의 어려움이 있어, 수도자들이 사는 수도원 건물을 피정집으로 꾸미고 수도자들은 병실과 수련실로 사용하던 건물을 수리하고 보수해서 수도원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2015년에는 각 방들에 화장실 및 샤워실을 설치하여 피정 객들이 좀 더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2인 1실 30개의 방을 소유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약 100에이커의 땅에 여러 종류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심어 추수감사절 다음날부터 성탄 직전 주일까지 판매하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농장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어 뉴튼 수도원하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수도원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성물방에서는 교회 절기에 따라 필요한 성물 및 선물 용품과 교회 서적들을 마련하여 공급하고 있는데, 1954년에 입회한 마리누스 수사님이 오랫동안 이 성물방에서 일하며 신자들에게 성물을 공급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영적 담화를 통해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증거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마리누스 수사에 대한 시복 시성이 미국 해양 사목부에서 추진되고 있는데, 페터슨 교구의 협력과 미국 주교회의 전폭적인 지지로 잘 진행되고 있으며 시복 시성 절차에 필요한 증거와 자료를 모으고 활동에 필요한 모금도 하고 있다. 그밖에 우리 형제들은 채소밭과 정원 그리고 건물 및 차량과 농기계들을 직접 고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우리 한인 형제들이 이곳에 와서 생활한지 벌써 22년째가 되는데,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한인 신자들을 위한 것보다 한번 쓰러진 이 뉴튼 수도원을 다시 한번 이 지역에서 일으켜 세워 베네딕도회 수도 영성이 활성화 되도록 하는 것이 더 큰 목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전례를 영어로 하고 이곳 현지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보다 한인 이민자들과 신자들에게 눈을 더 돌리고 그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2013년 한국 왜관 수도원에서 아빠스로 선출된 박 블라시오 아빠스의 승인으로 수도원에서 한국어 전례를 더 늘였고 한인들과 더 많은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피정집을 개축하고 응접실도 만들어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이 좀더 편하게 지내고 갈 수 있도록 하였다. 나아가 수도원 주위에 약 500여 그루의 여러 가지 꽃나무를 심고 길을 만들어 수도원 주위를 산책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하여 봄이 되면 수도원 주위 뿐 아니라 기도길에 벚꽃과 사과꽃 그리고 배꽃이 만발해서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이제 수도원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이룩한 업적이나 완성을 기념하고 축하하기보다 이를 계기로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하고자 한다. 주님의 은총과 많은 은인들의 도움으로 수도원이 점차 안정 되어 가고 있음에 감사드리며, 이제는 성전을 보수하고 개축하여 찾아오는 분들이 성전에서 주님을 만나고 감사하며 마음의 기쁨과 평화 속에서 은총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100주년을 맞이한 뉴튼 수도원이 앞으로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더욱 성장하고 지역 사회와 한인 이민자들에게 영적 쉼터와 평안을 제공하며 기도하고 일하는 단순한 삶 안에서 “아무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에 따라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한 세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다. 명백한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듯이 교회는 계속되고 베네딕도회 전통은 이어지고 있음에 하느님과 뉴튼 수도원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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