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3) – 합요섭 요셉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함요섭 요셉 수사

 

함요섭 요셉(Josef Grahamer, 咸要燮, 1888 – 1950) 수사는 1888년 6월 1일 뮌헨-프라이징München-Preising 대교구 아이젠호펜Eisenhofen에서 태어났고 벤노Benn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고, 세상에 태어난 지 넉 달 만에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결국 여섯 자녀의 양육은 전부 어머니에게 맡겨졌다. 어머니의 굳은 신앙은 가족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자녀들의 모범이 되었다.자녀들 중 넷이 수도성소를 받았다. 아들 둘이 딜링엔Dilligen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그리고 다른 아들 둘은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학비가 없었기 때문에, 재봉 견습생이 되었고 임시로 여러 직종의 도제徒弟로 일하였다. 1906년 10월 21일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자기 형, 클라버(Petrus Claver Grahamer, 1883-1940, 1909년 사제서품) 수사의 첫서원 예식에 참여한 후 수도원에 입회할 결심을 했다. 서원식에서 돌아온 후 불과 열흘 만에 그는 입회 청원서를 작성했다. “저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기로 확고히 결심하였기 때문에 저를 받아주시기를 겸손하게 청합니다. 이미 3년 전부터 예수 성심과 선교에 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려는 강한 충동을 느꼈으나 제가 너무 어렸고 최근에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이 원의를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회복하였고 하느님께서 저를 시험하셨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결심은 더욱 확고하고 수도생활에 제 마음이 더욱 끌리기 때문에 오직 수도회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 성심과 사랑하올 천상 모후께 온전히 제 자신을 맡겨드리며, 수도원에 즉시 받아들여지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비천하고 충실한 벤노 그라하머 드림”

1908년 그는 요셉이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였고, 1910년 10월 16일 첫서원을 발했다.첫서원을 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1911년 1월 7일 그는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어 막 기틀을 잡아가던 서울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계속하였고, 1913년 3월 23일 종신서원을 발하였다. 그는 재단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수도복과 제의 제작을 담당했으며, 수도원 재봉실에서 견습생들을 가르쳤고, 문간도 맡아 보았다. 그 다음 그는 병실 간호 책임자가 되었고, 수도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그의 솜씨를 보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 엇갈린 반응을 보이던 인근 주민들이 점차 그를 신뢰했고, 몇 몇 환자들은 요셉 수사의 자애로운 봉사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눈을 떴다.

그가 받은 치유의 은사는 서울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긴 후에 제대로 빛을 내었다. 경성 제국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장의 추천을 받아 3년 동안 내·외과 진료를 할 수 있는 면허를 취득한 그는, 1928 년 초 당국의 허가를 받아 수도원 내에 진료소를 열었다. 후일 경성 제국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 외과과장의 협조로 서울에서 임상경험을 쌓은 요셉 수사는 김재환 플라치도(1890-1962) 수사를 조수

로 삼아 수도원 인근의 가난한 이들을 치료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의 의료 활동에 대하여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멀리서도 온 환자를 포함해 일 년에 약 18,000명의 환자들이 요셉 수사를 찾아왔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세를 줌으로써 하늘의 문을 열어 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무료로 나눠주었기 때문에, 진료소 운영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무척 컸지만, 요셉 수사는 20년이 넘게 사랑의 의술을 펼쳤다.

8.15 광복 후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면서 공산주의가 북한에서 득세하였다. 1946년 무렵에 연길 수도원은 이미 중국 공산당에 의하여 폐쇄되었다. 덕원 수도원 선교사들은 삼엄한 통제와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948년 12월 요셉 수사는 가중되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겨우 일어났다. 1949년 4월 28일 요셉 수사는 한국인 간호부를 학대했다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 1949년 5월 8일 밤부터 10일까지 북한 정치보위부는 두 차례에 걸쳐서 수도원을 점거하여,독일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을 체포하였고, 이들을 평양 인민교화소로 이송하였다.

요셉 수사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사방 2.5m×3m 크기의 좁은 감방에 갇혀 5개월 동안 혹독한 수감 생활을 하였다. 역경 중에도 그가 보여준 아름다운 형제애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요셉 수사는 루페르트 클링자이스(Rupert Klingseis, 吉世東, 1890-1950) 신부가 임종할 때 찬 몸을 덥혀주기 위하여 그를 꼭 껴안고 있었다. 요셉 수사는 체포 당시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5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은 다른 수도형제들과 교화소에 계속 수감되었고, 나머지 수도형제들은 1949년 8월 자강도 전천군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교화소에 수감 중이었으나, 1950년10월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할 무렵, 퇴각을 서두르는 북한 인민군에게 10월 3일과 4일 사이에 총살당했다.

자료출처: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북한에서의 시련(분도 출판사)

분도 2009년 가을호 30-31 페이지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