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4) – 안세명 아르눌프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안세명 아르눌프 신부

안세명 아르눌프(Arnulf Schleicher, 安世明,1906-1952) 신부는 1906년 9월 21일 독일 로텐부륵Rotenburg 교구 플라움로크Pflaumloch에서태어나, 요셉Josef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에힝엔Ehingen에 있는 김나지움(Gynasium,독일의 인문계 중고등학교)을 졸업한 후 1925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926년 5월 15일 첫 서원을 한 후,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철학·신학 과정을 이수하였고, 신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였다. 1930년 7월 13일 딜링엔Dillingen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1932년4월 10일 조선으로 선교 파견되어 같은 해 7월 18일 덕원 수도원에 도착하였다. 내평內坪 본당(고산高山본당의 전신)주임 나국재 카누토(Canut Graf des Effans d’Avernas, 羅國宰, 1884-1950) 신부가 건강이 나빠져, 말을 배우던 아르눌프 신부가 그 해 12월 임시 보좌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5월 연피정이 끝나고 몇 주간 동안서울 대목구 내 본당에서 사목을 도우면서 말을익혔다. 그러다가 그 해 8월부터 약 1년간 원산元山 본당 주임 탁세영 파비아노(Fabian Damm, 卓世榮, 1900-1964) 신부가 일본에 체류하게 되자 임시 주임으로 사목하였다. 1934년 7월부터는 덕원 신학교에서 교의 신학과 성서 입문을 가르치면서 덕원 본당에서 고해성사와 강론 등을 하였으며, 이듬해에 신학교에서 성서 주석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천주교 간도 전래 4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1936년 8월 25일 용정 본당에서 ‘가톨릭교회와 현대사상’이라는 제목으로 기념강연을 하였다. 1937년 1월 24-31일에 개최된‘종교 주간’동안에는 원산 대목구 내의 본당 회장들과 교리교사들에게 호교론을 강의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28일 덕원 수도원에 도착한 7명의 독일인 성직지망 수사들의 양성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동양 언어에 능통했던 아르눌프 신부는 1938년에 50쪽 분량의『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라는교양서적을 저술하여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 1만 부를 간행하였다. 그의 가장 뛰어난 학문적 업적은 신약성경의 서간편과 묵시록을 우리말로 번역해낸 일이다. 성경의 우리말 번역 사업은 1935년에 열린 전선주교회의全鮮主敎會議의 결의에 따라 덕원 수도원에 일임되어 있었다. 아르눌프 신부는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로부터 성서 번역을 의뢰받고, 그 당시까지 번역되지 않았던 신약성경의 서간편과 요한 묵시록을 우선 번역하기로 하였다.성경 번역은 불가타(라틴어) 성경 원본을 참고하면서 그리스어 원문을 따랐다. 아르눌프 신부는 덕원 수도원 원장인 홍태화 루치오(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신부와 원산 대목구 소속 최병권 마티아(崔炳權, 1908-1949) 신부 그리고 평신도 김용학金龍學씨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번역작업을 진행하였다. 4년 동안의 각고의 노력 끝에 그가 번역해낸 신약성경의 서간편과 묵시록은 1941년 3월 25일『신약성서新約聖書 서간書簡·묵시편默示篇』이라는 제목으로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 아르눌프 신부 덕분에 조선 천주교회는 비로소 완전한 우리말 신약성경을 갖게 되었다.

1944년 12월 나벽재 레오폴드(Leopold Graf des Effans d’Avernas , 羅碧宰, 1887-1944) 부원장 신부가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부원장직을수행하면서 아르눌프 신부는 성직지망 수사들의양성을 맡았다.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성직지망 수사들과 평수사들의 양성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평수사들의 양성은 원장인 홍태화 루치오신부가 맡았다. 아르눌프 신부는 아주 작은 키에지성이 넘쳐 보이는 인상이었고, 성품이 온화하여 좀처럼 화내는 일이 없었으며, 대단히 친절하였다고 한다. 그는 수도원의 부원장, 신학교 교수, 성서 번역 그리고 광복 후에는 소련군과의교섭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수련자들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수련자들이 자율적으로 생활을 익히고정진하도록 배려했던 아르눌프 신부가 한 번은수련자들에게 “Fratres vos estis gaudium meumet corona mea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내 기쁨이며 면류관입니다. 필립 4,1) 라는 말을 했는데, 수련자들이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1949년 5월 9일 아르눌프 신부는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홍태화 루치오 원장신부,길세동 루페르트(Rupert Klingseiz, 吉世東, 1890-1950)신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었다. 같은 해8월 5일 독일인 선교사들이자강도慈江道 전천前川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이송되었으며, 이때 그는 평양 인민 교화소에 남게 된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로부터 모든 수도 가족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옥사덕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아르눌프 신부는 감시원들로부터 많은 욕설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같이 수용된 수도가족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성경과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내용을 들어 강론하였다. 1951년 겨울부터 숯 굽는 일을 하였지만, 이듬해 파종기播種期에 들어서면서 심장과 신장이 급격히 나빠져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또한 화농성 기관지염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고 있었다. 몸도 많이 붓고 발도 부어서 서지도 걷지도 못할 상태가 되자, 감시원들은 아르눌프 신부를 거름더미 위에 앉혀 거름을부수는 일을 시켰다.  결국 그는 기력을 완전히잃고 며칠 동안 앓다가 1952년 6월 28일 사망하여 옥사덕 수용소에 묻혔다.

자료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Necrologium(왜관 수도원)

분도 2008년 가을호 28-2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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