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아 [고진석 신부의 겸재 화첩 감상]


▲ 고산방학孤山放鶴|비단에 엷은 색|29.1×23.3cm|Releasing a Crane in Mount Gusahn|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소장

구제역이 있던 해 겨울은 살 떨리는 계절이었다. 근래 들어 겪어보지 못했던 유난스런 추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온 나라 농촌을 휩쓸어버린 몹쓸 역병 때문이기도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산목숨들을 모질게도 끊어버렸다. 처참한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해 봄은 그야말로 찬란한 슬픔의 봄이고 침묵의 봄이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요즘은 봄을 알리는 매화꽃 소식이 더욱 간절하다. 내내 매섭고 살벌한 겨울을 보냈으니 필시 그 향기 깊고 그윽할 텐데.

봄의 전령 매화는 선비들이 좋아하는 꽃나무이다. 이른 봄, 눈 속에서 꽃을 피워내는 매화는 선비의 지조를 쏙 닮았다. 그밖에 선비들이 좋아했던 꽃나무에는 깊은 산중에서도 청초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로 피어나는 난초, 늦가을에 모진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 한겨울에도 그 푸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가 있다. 선비들은 군자의 풍모와 덕행을 지녔다하여 이 꽃나무들을 사군자로 높여 불렀고, 글과 그림의 단골 소재로 삼았다. 겸재 정선이 그린 고산방학도(孤山放鶴圖)에 매화를 지극히 사랑했던 한 선비가 등장한다.

송나라 때 시인 임포(林逋, 967~1028)는 항주사람인데, 평생을 홀아비로 살면서 세속 일에 연연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살았던 시인이다. 그의 삶을 닮은 시는 맑고 그윽했지만 그는 시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싫어했다. 지은 시를 불살라 버렸고, 후세에 전하여질 것이 두려워 시를 읊되 기록하지 않기도 하였다. 그가 은둔한 곳은 서호(西湖) 근처의 고산(孤山)이란 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초당 주위에 수많은 매화나무를 심어 놓고 학과 사슴 한 마리를 기르며 처자도 없이 혼자 살았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사슴의 목에 술병을 걸어 술을 사러 보냈고, 손님이 오면 하늘을 날던 학이 이를 보고 울며 반겼다고 했다. 사람들은 임포를 두고,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두었다(梅妻鶴子)’고 했다.

고산방학도는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시중드는 아이를 곁에 둔 임포가 막 꽃을 피운 매화나무에 기대어 하늘로부터 날아드는 백학을 바라보는 장면을 담고 있다. 속세의 더러움이 하얀 눈 속에 감추어졌고, 강산의 적막함은 숨어사는 선비의 쓸쓸한 정감을 자아낸다. 적막강산에 잔설을 가지에 얹고 꽃을 피워낸 매화의 자태는 은일처사의 고고하고 청빈한 삶을 떠오르게 한다.

장수를 상징하는 신선의 새인 학 역시 청빈한 은자의 벗이 되었다. 이렇듯 고산방학도는 임포라는 인물과 서호라는 장소 그리고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가 한 화면에 어우러져 은일처사의 고아한 삶을 잘 드러내는 그림이다. 물론 겸재가 임포의 생활을 눈으로 보고 그리지는 않았다. 중국역사속의 유명한 인물들의 일화를 상상하여 그린 이런 그림들을 고사인물화라 한다.

겸재는 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단정한 필치로 인물의 복식을 그리고, 푸른색과 담홍색을 위주로 한 색채를 구사하여 인물에 강조점을 주고 있다. 비슷비슷한 구도와 장면들이 담긴 그림이 같은 제목으로 많이 전해진다. 그래도 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그림이다.

아직도 축생들의 원혼과 죽음의 악취가 음산하게 떠다닐 지도 모르는 이 봄에 매화타령이 가당키나 한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김없이 찾아온 봄의 전령을 시인의 입을 빌어 반겨본다. “모든 꽃들 다 졌는데 홀로 아름다워, 풍정을 독점하고 정원을 향하였네.(衆芳搖落獨暄姸 占盡風情向小園) 맑고 얕은 물 위에 성긴 그림자 가로 비끼고, 황혼녘 달빛 속에 은은한 향기 떠도누나.(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산원소매山園小梅 중)

고진석 이사악 신부(성 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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