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강산 천하제일, 연광정 [고진석 신부의 겸재 화첩 감상]

▲ 연광정 練光亭|비단에 엷은 색|28.6×23.9cm|Yeongwangjeong Pavilion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소장
▲ 연광정 練光亭|비단에 엷은 색|28.6×23.9cm|Yeongwangjeong Pavilion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소장

중원의 큰 나라를 흠모하고 섬겼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하늘의 자손인 줄도 잊어버리고, 아침 첫 햇살을 맞는 신령한 백성임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궁벽한 동쪽 나라 오랑캐라고 얕잡아 보이면서도 대륙의 빛나는 문명을 누리고 싶어 안달했다.

무엇을 하든 큰 나라 사람들을 따라하면서도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 칭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것은 무엇이든 촌스럽고 속되게만 보였으므로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남의 식대로만 흉내를 내었다. 그러던 이 나라 사람들의 눈에 어느 때부터인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이 보이고, 우리 겨레의 정겨움이 가슴에 다가왔으니 어인 까닭인지 모르겠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강산을 화폭에 담아내려는 시도들이 늘어났다. 이런 흐름에 겸재 정선이 우뚝 솟아있다. 물론 겸재 이전에도 실제 산천을 그리는 전통은 있었다. 하지만 실경산수(實景山水라 불리는 이런 그림들과 겸재의 그림은 달랐다.

겸재는 맑고 투명한 하늘 아래 수려한 자태로 빛나는 실제 풍광을 자신만의 독특한 붓놀림으로 담아냈다. 그는 중국 산수화의 두 갈래인 북종화와 남종화를 절충·조화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일구어 냈다. 북종화는 투명한 대기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화북지방의 산세를 선(線) 위주로 나타냈고 남종화는 늘 안개가 끼고 물이 많은 강남지방의 풍경을 먹의 번짐을 통해 표현했다. 겸재는 양자의 절묘한 조화를 통하여 우리나라 금수강산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표현하였다. 겸재는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새로운 화풍으로 조선 회화의 어엿함과 긍지를 보여주었다.

이번에 소개되는 그림은 겸재 정선이 그린 연광정(練光亭)이다. 지난 2006년,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반환된 겸재 화첩에 끼어 있는 그림이다. 연광정은 평양의 대동강 강변에 위치하여 경치 좋기로 유명한 정자이다. 두 채의 건물이 기역자로 모서리를 맞추어 지어진 정자는 사면이 탁 트인 바위 위에 얹혀 있다. 이 바위가 덕암(德巖)이고, 그 아래편 옹성으로 둘러싸인 문루가 평양성의 동문이자 정문 노릇을 했던 대동문(大同門)이다.

대동강을 건너 대동문으로 평양에 입성한 사람들이 다리도 쉴 겸, 풍광도 즐길 겸 오르던 곳이 연광정이었다. 대동강 물결에 햇살이 아른거리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기에 정자 이름이 연광이다. 정자와 누대치고 좋은 경치를 끼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마는 연광정은 특별하다.

정자에 올라 강의 위쪽을 바라보면 모란봉과 청류벽이 강기슭을 병풍처럼 두르고 그 앞에는 능라도가 그림처럼 떠 있다. 그 광경은 마치 햇빛에 빛나는 비단결 같다. 강 건너 아스라이 보이는 벌판과 긴 숲 밖에 점찍은 듯 이어진 산들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장관이다. 그러기에 연광정은 관서팔경(關西八景) 중 하나로 꼽혔고, 주지번(朱之蕃, 1595-?)이란 명나라 사신은 그 풍광에 놀라 제 손으로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어놓았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솜씨를 지닌 겸재도 조선제일, 아니 천하제일의 경치를 화폭에 담았다. 겸재의 낙관 옆에 쓰인 <해동제일승 제일필>(海東第一勝 第一筆)이라는 글귀가 그 뜻이다. 아직도 열리지 않은 북녘 땅의 절경이 대가의 차분하고 꼼꼼한 필치 아래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고진석 이사악 신부(성 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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