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6) – 김동철 마르코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김동철 마르코 신부

덕원-함흥 교구, 1913년 1월 3일 생, 부산 영주동
세례명: 마르코
사제 서품: 1943년 3월 6일
소임:  덕원 신학교 교수, 평양 대목구 안주 본당과 비현 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1950년 6월 27일, 평양 대목구 비현 본당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신의주(추정)

 

김동철 마르코(金東哲, 1913-1950) 신부는 1913년 1월 3일 부산시 영주동에서  김성준 요셉과 박부경 벨다 슬하의 일곱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대구 대교구  김동언(金東彦, 1898-1981) 신부가 그의 친형이다.그는 병인박해 순교자 가운데  한 분인 남종삼 요한 성인의 후손인데, 그의 어머니가 남종삼 성인의 손녀이다.  언양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중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와세다 대학 전기공학과에 진학했다. 와세다 대학에 다니던 그는 도쿄 대교구장 샴봉(Jean-Baptiste-Alexis Chambon, 1875-1948) 대주교의 비서 겸 주교관 수위로 일했다. 그런데 주교관에서 일본을 여행 중인 덕원 수도원의 파비아노 담(Fabian Damm,卓世榮,  1900-1964) 신부를 만난 것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덕원 신학교에 입학했다.

덕원 신학교를 졸업한 김동철 마르코 신부는 1943년 3월 6일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서품 직후  모교인 덕원 신학교 교수 신부로 발령을 받아 재직하면서, 함흥 본당 신부가 여행 중이거나 부재중일 때에는 그곳에 가서 사목활동을 돕기도 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미국인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하는 정책을 감행하였다. 이에 1942년 6월 1일 평양 대목구장 윌리엄 오셰아(William F. O’Shea, 1884-1945) 주교를 비롯한 메리놀회원 전원이 본국인 미국으로 송환되었고, 평양 대목구장직은 새로 주교로 서품된 노기남(盧基南, 1902-1984)경성 대목구장이 잠시 겸직했다가, 1943년 3월 9일 홍용호(洪龍浩, 1906-?) 프란치스코 신부가 평양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홍 프란치스코 주교는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각 교구에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다.김동철 마르코 신부는 덕원 면속구에서 평양 대목구로 파견되어, 1944년 11월부터 평안남도 안주(安州) 본당의  제6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946년 10월까지 사목하였다. 1945년 4월 9일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초대하여 분원을 설립토록 하였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갖가지 제약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일 수 없었지만,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자들에게 자치 능력과 자급자족 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손수 농사를 짓는 한편 염소를 키우기도 하였으며, 나무키우기에도 열성이어서 비가 오면 신자들과 수녀들까지 묘목 심기에 동원하는 등 많은  힘을 쏟았다. 해방 후 본당에 ‘우리말 공부 교실’을 개설하여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

1946년 10월에 김동철 마르코 신부는 평안북도 비현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어 1950년 6월 27일까지 사목했다. 1947년 초, 본당에서 운영하던 성심학교 교사를  비현면 인민위원회가 징발하려하자 이에 저항하다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종교교육을 한다는 고발로 체포되어 의주군 내무서에 삼 일간 구금되기도 하였는데, 끝내 성심학교는 폐교되고 인민위원회에 강제 몰수되고 말았다. 이 일뿐 아니라 그는 공산당에게 갖가지로 시달림을 받느라 사목활동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48년 8월 27일에는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 수녀들을 비현 본당에 초대하여 선교활동을 하게 했다. 1949년 5월 14일 평양 대목구장 홍 프란치스코 주교의 불법 납치를 시작으로 교구 내 성직자들의 수난이 본격화되었다. 김동철 마르코 신부는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수난의 때가 다가오리라 예측하고, 다른 신부들의 피랍 소식이 전해올 때마다 성체를 거두는 일을 거듭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목자는 자기 양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홍 프란치스코 주교의 당부를 되새기면서 본당에 단 한 명의 신자가 남아 있어도 자신은 교회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신자들에게 표명했다. 김동철 마르코 신부는 1950년 6월 27일 밤에 평양 대목구 내 성직자 중에서 가장 늦게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되던 날 저녁에 성당 종을 울려 신자들을 성당에 모으고는 짧은 이별 강론을 하였다. 그는 교우들을 향해 “부디 조용히 하시오. 모든 것이 천주의 섭리로 되는 것이니 소동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잡혀 갔다. 그 후 의주 형무소에서 삶은  옥수수 한 주먹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후의 행방은 불분명하나 피살되었음이 분명하다.

참고문헌: 천주교평양교구사(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1981년),북녘 땅의 순교자들: 평양교구 편(평양교구순교자자료수집위원회, 1999년)

분도 2011 가을호 26-2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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