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0) – 길세동 루페르트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길세동 루페르트 신부

 

길세동 루페르트(Rupert Klingseis, 吉世東, 1890-1950)신부는 독일 뮌헨München 교구 마리아 힐프Maria Hilf 본당 출신으로, 1890년 1월 5일에 태어나 요셉 Josef 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1904년부터 마인Main 강변에 위치한 상트 루드빅St. Ludwig 소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김나지움으로 옮겨 최고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10년 가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한 그는 1년간 법정 수련을 받고 1911년 10월 8일 첫 서원을 했다. 그 후 로마 성 안셀모St. Anselmo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15년 7월 16일 딜링겐Dillingen 신학교에서 아욱스부륵 교구장 링그(Maximilian von Lingg, 1842-1930)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918년에는 뮌헨 대학교에서 베움커Bäumker 교수의 지도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철학 단과대학(연합회내의 독일출신 성직수사들을 위한 2년제 신학교로 철학과정만 설치되었다.) 에 학생들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여러 신학교로 출강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1922년부터 1930년까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철학 단과대학 학장직을 수행하면서 철학 강의를 하였으며, 5년간 수도원에서 부원장으로 봉사하였다. 1930년 덕원 신학교의 철학 교수로 있던 김시련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 Schmid, 金時練, 1883-1962) 신부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보좌 아빠스로 선출되어 독일로 돌아오자, 루페르트 신부가 그를 대신하여 1930년 11월 9일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15년 동안 덕원 신학교에서 철학, 라틴어, 교회사 등을 가르치며 신학생 양성에 매진하고 피정지도도 활발히 하였다. 1940년에는 국민 계몽 총서 제1권으로『인간의 영혼은 물질인가 정신인가』를 펴내기도 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매우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성무일도를 바치다가 갑자기 정전되어 성당이 깜깜해지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가 외우는 시편 소리만 성당에 울려 펴졌다. 반면에 일상사에 대한 상식은 전혀 없었다. 당시는 물품이 귀하던 시절이라, 신학교에서 교수 신부들이나 손님들을 위하여 짚신을 실내화로 대신 비치해 놓았는데, 그는 짚신을 어떻게 신는지 몰라서 항상 거꾸로 신고 다녔다. 그는 일에 매우 서툴렀는데도, 공동체 의식이 투철하였기 때문에 공동소임에 절대로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 당시에 밀을 수확하는 시기가 오면, 공동체 전체가 수도원 농장으로 나가 밀을 베었는데, 그도 항상 밀수확을 도왔다. 6월 하순이라 날씨가 더워서 멱을 감을 정도로 땀을 흘려가면서도 그는 싫은 내색하지 않고 일을 했다. 서투른 일을 너무나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다른 형제들이 아무리 말려도 공동소임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수도 형제들은 하는 수 없이 그가 일을 하도록 놔두었고, 대신에 한 명이 뒤를 따라다니며, 그가 해 놓은 일을 다시 고쳐 놓곤 했다. 덕원 수도원에서 그와 함께 생활했던 수도형제들은 그를 두고 기도하고 일하는 전형적인 베네딕도회 회원이라고 평했다. 그는 기도에 열심이었고, 학문 연구에도 매진하였다. 그는 학식으로 쌓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살면서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였다.

아는 바를 반드시 실천하고자 했던 루페르트 신부의 모범적인 삶은 어려운 시기에 수도원을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소련군의 진주와 북한 공산당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는 계속 운영되었고, 그 역시 철학강의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1949년 5월 9일 이른 새벽, 수도원을 포위한 북한 공산당원들에 의해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z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 홍태화 루치오(Luzius Roth, 洪泰華,189 0-1950) 원장 신부, 안세명  아르눌프(Arnulf Schleicher,  安世明,  1906-1952) 부원장 신부와 함께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었다. 1949년 8월 5일 덕원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에서 잡혀온 독일인 수도자들이 옥사덕 수용소로 떠났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7명의 수도형제들은 유죄판결을 받고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그가 받은 혐의는 반공산주의 책자 저술이었는데, 1940년에 저술한 책이 빌미가 되었다. 국제 신앙 기구(Agentia Internationale Fides)에 따르면, 루페르트 신부는 1950년 4월 6일 평양 인민 교화소에서 영양 실조로 사망하였고, 평양 교외의 묘지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와 함께 안장되었다.

자료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 교회사 연구소),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분도 2009년 봄호 20-21 페이지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