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2) –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덕원-함흥 교구, 1912년 생, 서울 이화동
세례명: 가브리엘
사제 서품: 1940년 3월 25일
소임:  덕원 신학교 사감, 회령 본당 및 계림 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원산 수녀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평양(추정)

 

구대준 가브리엘(具大浚, 1912-1950(?)) 신부는 1912년 4월 27일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구종진具鐘震 프란치스코는 한말 궁내부 주사로 관직에 있다가 한일합병 이후 순사 교습소의 한문 교관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순교자 가문 출신인 어머니 이정자李貞子 마리아를 배필로 맞아드리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삼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가브리엘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열네 살 되던 해 어의동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를 졸업하자 그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사제의 길을 걷고자 했다.그의 형 원준元浚이 일본에서 1923년 대지진으로 행방불명 된 후 라, 장남노릇을 해야 하는 그가 아직 어린애인 동생 상준常浚(시인 구상具常 세례자 요한, 1919-2004)만을 남기고 출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지가 굳을 뿐 아니라 부모도 성소의 막중함을 아는 지라 이를 허락했다. 그는 1926년 백동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운영하는 대목구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백동 수도원이 덕원으로 이전했고, 원산 대목구 소신학교도 같이 옮겨갔다. 마침 관직에서 물러난 아버지가 수도원에서 교육사업을 도와달라는 청을 받았다. 아버지는 아들 뒷바라지도 할 겸해서 가산을 정리해 온 가족과 더불어 덕원 수도원 아랫마을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수도원 인근의 문평, 옥평 등지에 해성학원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어 육영사업에 힘썼다.

그는 과묵하고 생각이 깊어 철학, 신학 과정에 모두 두각을 나타냈으며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문학에 뛰어났고 덕성이 깊어 동료들과 화목했다. 1940년 3월 25일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주교 아빠스의 주례로 이재철 베드로(李載喆, 1912-1950) 신부와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서품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덕원 신학교의 사감 신부로 임명되어, 신학생들에게 자율적이면서도 책임을 다하는 생활을 하도록 지도했다. 1942년에는 흥남 제2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당시 본당 신자들은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가난한 이주민들이었고, 대부분 질소비료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는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벗이 되어주었다. 노상 밤이 이슥하도록 본당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온종일 교우들에게 시달리면서도 강론준비를 철저히 해서 주일마다 교우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생활은 매우 엄격해서 식복사를 두지 않고 식사를 본당 회장댁에서 해결했는데, 수수와 좁쌀이 가득 섞인 험한 잡곡밥에 반찬도 그 집 식구와 언제나 똑같이 먹었다. 의복도 두 벌 이상 가지고 있지 않았고, 생활비도 교구에서 지급되는 한도에서 충당하고, 미사예물은 전부 자선활동에 사용했다. 그즈음 아버지가 중풍으로 4년간이나 병석에 있었다. 효성심이 깊었던 그는 주일마다 거르지 않고 친히 아버지께 성체를 모셔다 영해드렸을 뿐 아니라 변비가 잦은 아버지의 항문을 손가락으로 손수 후벼내 뒤를 보게 하는 정도였다. 어쩌다 과자나 과일 같은 선물이 들어오면 모아서 부모에게 가져다 드렸다.

그는 흥남에 수용되어 있던 연합군 포로들을 찾아가 성사를 집전할 정도로 용기가 있었다. 또한 일제의 사설학원 폐쇄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해성海星 학원을 계속 운영하였다. 1944년 봄에는 교우 김봉학의 도움으로 사제관에 대건 의원을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사제관을 병원으로 내놓고 조그만 목조건물로 본당 사무실과 처소를 옮겼다. 의사 서영옥 마리아 데레사가 의원을 맡았는데,그녀는 후일 동생 구상 시인의 부인이 되었다. 광복 후 점점 득세하는 공산당의 탄압으로 신앙이 약한 신자들이 하나 둘 교회를 멀리 하는 형편에서도, 그는 원산 수녀원에 수녀를 요청하여 1948년 5월 20일 원산 수녀원 흥남 분원을 설립했다.

회령 본당의 비트마르 파렌코프(Witmar Farrenkopf, 朴偉明, 1906-1945) 신부가 소련군에 피살되고 계림 본당의 프리돌린 짐머만(Fridolin Zimmermann, 閔德基, 1900-1946) 신부가 사망하자, 1949년 1월 25일 그는 두 본당의 교우들을 돌보기 위해 자원하여 부임해 갔다. 그가 그런 결심을 할 무렵 동생이 이를 만류하고 함께 월남을 권하자 “저 독일인 성직자들은 고국을 버리고 한국에 와서 이 고초를 겪는데, 내야 내 땅,내 교구, 내 본당, 내 교우들이 있는데 이를 버리고 가기는 어디를 가느냐?”고 잘라 말했다. 그는 1949년 5월 10일에 원산 수녀원에 한국 수녀들의 연례피정 지도를 하러 갔다. 피정을 시작한 그날 밤 그는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그 다음날 평양 인민교화소에 이송 수감되었다. 그는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와 함께 격리된 작은 감방에 있었다. 1949년 8월 5일경 그는 무척 쇠약한 상태에 있었던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에게 병자성사를 거행했다. 이후의 행방은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던 호노라도 밀레만(Honorat Millemann, 南道光, 1903-1988) 신부는 “평양 형무소에서 같이 있었는데 언제나 근엄하고 맘과 얼굴에 기쁨의 미소와 평화를 잃지 않고 아주 평화스러운 사제로 끝까지 살다가 어느 날 어디론지 끌려가서 그 후 다시 만나지 못했어요.”라고 술회했다.

자료출처 具 가브리엘 大浚 신부(분도출판사, 1984년), Schematismus(오딜리아 연합회), 북한에서의 시련(분도출판사, 1997년)

분도 2011년 봄호 26-2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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