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8) – 파스칼 팡가우어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파스칼 팡가우어 수사
1882년 1월 8일 생, 독일 레겐스부르크 교구 출신
세례명: 세례자 요한
첫서원: 1907년 10월 20일
한국 파견: 1909년 11월 7일
소임: 백동과 덕원 수도원 농장 및 정원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원산 본당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4월 16일, 옥사덕 수용소
파스칼 팡가우어Paschalis Fangauer 수사는 1882년 1월 8일 독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교구의 쾨퍼링Köfering 본당에 속한 엑글핑Egglfing에서 소농이었던 아버지 미카엘과 어머니 마리아 슬하에서 태어났다.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는 11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독실한 부모 밑에서 충실하게 신앙을 배우며 자라났다. 그 덕분에 5명의 형제자매들이 성소를 받았다. 누나 블라시아Blasia 수녀, 여동생 멜리타Melitta 수녀와 에르멘프리다Ermenfrieda 수녀는 수도성소를 받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있는 수녀회에 입회했고, 모두가 각자의 수녀원에서 원장으로 봉사했다. 철학·신학 박사였던 동생 게오르크Georg 신부는 살레시오회 헌신자로 미국에서 본당신부로 활동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형 미카엘이었다. 미카엘은1900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바르나바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생활을 하였다. 바르나바 수사는 모범적인 수도자였고, 30년이 넘도록 수도원 정원관리를 담당했다.
쾨퍼링 본당 주임신부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아빠스에게 쓴 편지는 젊은 파스칼 수사가 어떻게 성소를 택하기로 결심했는지 보여준다. “제게 이야기한 대로요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유혹으로 인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어렵지만, 그는 양심의 보호를 받아서 자기 형처럼 세상과 결별하기를 원합니다. 요한은 훌륭한 청년으로 정말 순수합니다. 더군다나 성격도 밝고 쾌활합니다.” 또한 그가 수도원에 제출한 입회청원서를 보면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원의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수 있다. “불쌍하고 약한 죄인이 높으신 분의 인도를 받아 심사숙고한 결정에 겸손하게 순종하고,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당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수도원에 받아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하셨듯이 저를 불쌍하게 여겨 주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요청을 수행하도록 제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고, 언젠가 그분의 자비로 제가 ‘오너라!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저의 진정하고 분명한 원의입니다.”
1905년 10월 15일, 그는 파스칼이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07년 10월 20일, 첫서원을 발한 그는 수도원에서 형인 바르나바 수사를 도우며 정원에서 일했다. 수도원에 입회 하기 전부터 이미 그는 정원사 조수로 일했고 바이에른 주 정원사 협회에서 주는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1909년 11월 7일, 27세의 파스칼 수사는 2명의 신부와 4명의 수사로 구성된 한국진출 제1진에 포함되어 서울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듬해부터 서울 백동 수도원에 과수원과 농장을 일구었고 조경공사를 했다. 1911년 종신서원을 발한 그는 숭공학교에서 원예과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국 청도靑島 로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되어 1914~1920년까지 일본에서 수용소 생활을 겪기도 했다. 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자 서울 수도원 수도자들이 선교현장에 뛰어들었고, 그도 1923년 원산본당으로 발령 났다. 그는 1949년까지 그곳에 기거하면서 역시 농장과 과수원을 일구었다. 특히 그는 채소와 과일을 많이 재배하였으며 당시에는 비싸고 귀한 작물이었던 포도를 재배하여 팔기도 하였다.
1949년 5월 11일 밤 파스칼 수사는 원산 본당에서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북한 공산당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바로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덕원 수도원에서 체포된 독일인 수도형제들과 함께 평양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는 원산에서 이미 위염을 앓고 있었지만 평양 인민 교화소와 옥사덕 수용소의 거친 음식을 이겨냈다. 옥사덕에서 그는 부엌과 방의 땔감으로 쓸 섶나무를 묶는 일을 했다. 그는 아주 열심히 신체를 단련하였는데, 밤마다 얼음장 같은 개울물로 목욕을 했다. 냉수마찰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는 한동안 수용소 생활을 잘 버텼다. 그러나 만성설사, 복부팽만, 심장마비 같은 증세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몇 주 동안에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훌륭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휴식과 명상의 시간을 허락하심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번 표현하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 아주 만족해했고, 병자성사를 받은 후에 주님의 부르심에 영원히 따를 준비를 하였다. 그는 1950년 4월 16일 사백주일(부활 후 첫 주일)에 선종하여 옥사덕 수용소에 묻혔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원산수녀원사(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1988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분도 2010년 가을호 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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